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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김일손

사육신 묘의 유래,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육신 묘의 유래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있는 것은 생육신 김시습(14351493) 때문이고, 사육신이 충절의 아이콘이 된 것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1455년 윤 6월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시습은 단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학사상의 핵심인 왕도정치의 붕괴였다. 주공이 되겠노라고 한 수양대군의 언행은 완전 거짓이었다. 통곡 끝에 그는 책을 불살랐다. 현기증을 느끼고 똥통에 빠졌다.

 

14566월 단종복위 운동 실패로 육신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에서 한양으로 달려갔다. 그는 성삼문 · 박팽년 등의 국문 현장을 지켜보았다. 68일에 성삼문은 부친 성승과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등과 함께 군기감 앞(지금의 서울 시청 본관 동쪽)에서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다. (박팽년은 옥중에서 죽고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했다)

 

성삼문은 수레에 실려 죽임을 당할 때 시 한 수를 읊었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擊鼓催人命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나를 재워줄꼬 / 今夜宿誰家

 

그 딸이 나이 대여섯 살쯤 되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한편 68일의 세조실록에는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 박쟁· 송석동· 이휘· 별감 석을중 등이 세조 앞에 끌려왔는데, 세조는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이개 등을 거열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잣거리에 효수(梟首)하였다. 또한 친자식들도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형제·자매들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보내라고 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랬으니 아무도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 냈다. 시신을 수습하면 잡혀갈 판이었다. 그때 김시습이 나섰다. 그는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성승 등 다섯 시신(한 사람은 미상이다)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삼았다. 그리고 다시 방랑길을 떠났다.

 

성삼문 · 박팽년 등이 처형 당한지 23년만인 1489년에 남효온은 관서지방을 오래 돌다가 고향 의령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였으나,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하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박팽년 · 성삼문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을 지었다.

남효온은 육신전초안을 승정원 주서 김일손(14641498)에게 보냈다. 1498년 무오사화의 희생자 김일손은 육신전승정원일기등에 의거해 교정하였다.(탁영 선생 연보 1490)

 

1490년 가을에 남효온은 김일손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김시습을 만났다. 세 사람은 밤새 담소하고 백운대에 등정하였으며 닷새 동안을 같이 지냈다. 아마 단종과 육신에 대하여 이야기 했으리라.

 

 

육신전은 재야 사림들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고, 선조 때는 백호 임제가 소설 원생몽유록을 짓기도 했다. 이어서 숙종은 1691년에 사육신을 복작하고 사육신묘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는 1782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1995년에는 사육신 육각비가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