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동맹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달빛동맹. '달구벌'과 '빛고을'이 뭉치고 있다. 미래차 동맹을 하고,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대구시립국악단이 ‘교류음악회'를 하였으며, 대구의 '2·28민주운동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될 수 있도록 광주가 힘을 보탰다.
달빛동맹은 넓게 보면 영·호남 연대이다. 역사적으로 영·호남은 의기투합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13년간의 소통,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전라도 의병 지원, 한말 호남의병과 영남의 독립운동, 1910년에 나라를 잃자 구례의 황현과 안동 이만도의 순국 등 영·호남 연대는 의(義) 자체였다.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교류는 1558년에 시작되었다. 문정왕후의 불교 진흥으로 유학이 힘을 잃은 명종 시절에, 퇴계와 고봉의 8년간의 사단칠정논변은 성리학에 불을 지폈다.
1569년 2월에 퇴계는 낙향하면서 선조에게 고봉을 명유(名儒)로 추천했다. 퇴계는 영남 제자에 얽매이지 않았다.
#. 임진년 9월, 진주성이 위험하자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은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진주성이 무너지면 전라도도 온전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최경회는 ‘호남도 우리나라 땅이요, 영남도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말하면서 진주로 향했다. 1592년 10월 김시민의 ‘진주대첩’은 외곽 지원을 한 전라도 좌 · 우의병의 힘이 컸다.
한편 1593년 6월의 제2차 진주성싸움은 김천일 · 최경회 · 고종후 등 호남 의병만의 고립무원이었다. 김성일은 4월29일에 죽었고, 명군과 관군 심지어 의병장 곽재우마저 10만 왜군에 겁내어 떠났다. 고립된 진주성을 지키고자 최경회는 9일 동안 싸우다가 순절했고, 애첩 논개 또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빠져죽었다.
#. 1908-1909년 사이에 호남의병들은 전국에서 가장 가열 차게 의병투쟁을 하였다. 호남의병은 조선 최후의 불꽃이었고, 일본에게는 조선을 집어삼키는데 마지막 걸림돌이었다.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까지 일본은 한일병탄의 사전 작업으로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을 실시했다. 사실상 호남의병 대학살이었던 이 작전은 일본군 2개 연대 2,300명과 군함 10척이 동원되어, 420명의 호남의병을 죽이고, 3,100명을 체포하였다.
#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이 세상 이미 없어졌구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글 배운 사람
제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1910년 8월에 조선이 망했다. <매천야록> 저자인 구례의 선비 황현은 절명시 4수를 쓰고 독약을 마셨다. 퇴계 후손인 을미 의병장 이만도도 안동에서 단식하다 순국했다.
한편 나라가 망하자 안동의 이상룡은 가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시인 이육사는 광야에서 독립을 외쳤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중략)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20대 총선에서 대구에서 야당후보가, 전주와 순천에서 여당후보가 당선됐다. 지역주의가 붕괴되고 있다. 바야흐로, 영·호남이 헌법가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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