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하서공의 칠석부를 외우더니
칠월 칠석 날에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구나.
맑은 마음에 재주 있는 너를
어디 간들 다시 생각나지 않으랴
悼婢蘇合
每誦河西賦 매송하서부
還從七夕歸 환종칠석귀
明心將素質 명심장소질
何處更依依 하처경의의
이 시는 기묘명현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셋째 아들이요 선조 임금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송천 양응정(1519-1581)이 여종 소합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입니다.
소합이 어떤 여종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양응정은 이 시에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아 놓아 그나마 그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사로 서울에서도 이름났으며, 칠석부 七夕賦를 잘 외웠다. 고죽 최경창이 그녀를 극진히 아껴주었는데 나이 열일곱에 칠월칠석날 죽었다.
칠석부 七夕賦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1528년 그의 나이 19세 때 칠석날 열린 성균관 백일장에 참가하여 장원한 노래로서, 견우와 직녀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55구에 이르는 장편 노래입니다. 하서의 백일장 장원에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 이 글은 너무 잘 지어졌기 때문에 시골의 유생이 지었다고 보기가 힘들고 남의 글을 베낀 것으로 의심이 되어서 출제위원인 대제학 이행(李荇)이 하서를 불러 일곱 가지 과제를 다시 내어 시험을 보였다 합니다. 이때 하서는 그 자리에서 막힘없이 뛰어난 글을 지어 대제학 이행이 다시 한 번 경탄하였다 합니다.
그 후 이 노래는 너무 인기가 많아 장안의 기생들이 앞 다투어 읊었다고 하며, 소설 <김하서전>에도 칠석부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평소에 여종 소합을 아껴준 고죽 최경창(1539-1581)은 양응정의 문인으로서 손곡 이달, 옥봉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 특히 기생 홍랑과의 애절한 사랑을 한 풍류객입니다. 기생 홍랑이 지은 시조, ‘묏 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나인가도 녀기쇼셔.’의 주인공이며, 요즘말로 훈남 이었습니다.
이 만시를 읽어 보면 여종 소합은 양응정과 최경창이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자주 칠석부를 읊었나 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녀가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칠월칠석날 죽은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되었을 까요. 애절한 노래 칠석부를 너무나 애창하다 보니 운명이 그녀를 칠석날 죽게 한 것일까요.
아무튼 이 시는 1,2구에서는 여종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3,4구에서는 여종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한편 전라도 화순 출신 양응정은 그보다 나이가 9살 위인 장성출신고향 선배 하서 김인후를 매우 존경하였나 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의 <성옹지소록>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하서 김인후는 인품이 매우 높고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그를 인재로 여겼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맨 먼저 불러들였는데 그가 서울에 오자 임금이 승하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귀가하였는데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송천 양응정은 기개가 높기로 당대에 뛰어났는데, 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여 그의 말을 공손하게 받들면서 감히 한 마디도 못하였다. 공의 앞에서 물러 나와서는 여러 날을 감탄하면서, “후지(厚之 김인후의 자)는 지금의 안자(顔子:공자의 수제자 안회)이다.”라고 하였다.
하서 김인후의 <칠석부> 일부를 여기에 싣습니다.
가을바람 소슬하게 일어나는 이 저녁
궁궐은 우뚝이 둘러서 있는데
은하수 환한 빛을 바라보니
이 좋은 계절이 이름이 났음을 느끼게 되네.
멋진 낭군과 만나볼 기회임을 생각하고
저무는 해에 만날 날을 약속했다오.
(중략)
바라건대 견우와 직녀는
오랫동안 헤어진다 하여 슬퍼하지 마오.
저 하늘 멀리 바라다보며
이 속세에서도 기다리는 사람 있으니
길은 아득하고 아득하여 갈 수도 없는데
그 누가 견우 직녀 만남을 엿볼 수 있으랴
괴이하구나, 배타고 하늘로 간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홀로 물결 거슬러 올라가며 이리저리 바라봐도
끝내 망망하여 알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이야기를 참과 거짓 사이에 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