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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임진왜란 극복의 올곧은 명신 이덕형 (2),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 극복의 올곧은 명신 이덕형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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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14  17: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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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602년에 이덕형은 영의정이 되었다. 나이 42세였다. 1604년 6월에 선조는 임진왜란 극복에 헌신한 신하들에게 공신 책봉을 하였다.

호성공신, 선무공신, 청난공신 등이었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한양에서 의주까지 호종한 데 공로가 큰 신하들로 1등에 이항복, 2등에 류성룡, 이원익, 윤두수, 3등에 의관과 내시 등 모두 86명이었다, 임진왜란 전쟁에 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 · 권율 · 원균 등 18명이었고, 이몽학의 난 수습에 공을 세운 청난공신은 홍가신 등 5명이었다.

1601년에 시작된 공신 선발은 논란이 많아 4년을 끌었다. 특히 호성공신은 86명이나 되는데 선무공신이 18명뿐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공신 책봉이었다.

그런데 이덕형은 호성ㆍ선무공신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1604년 3월1일 선조수정실록에서 사관은 이덕형이 선발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것은 국명(國命)으로 적진을 드나들고 뒤에는 중국 장수를 접대하느라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쓴 것이 또한 여러 해였기 때문이다. 그가 힘을 다해 수고한 것이 여러 신하들 가운데 으뜸인데도 끝내 훈봉(勳封)되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덕형이 호성공신에는 끼지 못하였으나 선무한 공으로 논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니, 이것이 정론(定論)이다.

1600년에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별세하자, 선조는 1602년에 영돈녕부사 김제남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선조는 50세, 인목황후(1584-1632)는 18세였다.

그런데 1606년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1606-1614)을 낳자 세자 광해군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유영경 등 소북은 세자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당쟁이 확대되었다. 선조는 내심 두 살밖에 안 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런데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피바람이 일었다.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에 1609년에 죽였다.

1613년 4월에는 칠서의 옥이 일어났다. 조령에서 한 상인이 살해당하고 은자 수백 냥이 탈취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범인은 양반의 서자인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자들이 여주 강가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정권 실세인 대북 이이첨 등은 이를 역모 사건으로 조작하였다.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 등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말하면 살려주겠다는 꾐에 빠져 거짓 자백을 하였다.

이리하여 대북파들은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처형하라고 상소하였다. 영의정 이덕형은 좌의정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런데 좌의정 이항복은 역모에 연루된 정협을 등용한 일로 탄핵을 받아 6월에 노원으로 물러났다.

영의정 이덕형은 홀로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처형 대신 유배를 주청하였다. 7월 하순에 광해군은 이덕형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고 강화도로 위리안치하였다.

그런데 대북파들은 내친김에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 폐모까지 들고 일어났다. 이덕형 혼자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을 한꺼번에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탄핵을 받아 8월에 삭탈관작 되어 운길산 밑 용진(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마을)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이러함에도 대북파의 탄핵은 계속되었다. 한음은 식음을 전폐하고 찬 술만 마시다가 10월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였다.

이덕형의 부음이 들려오자 온 백성이 슬퍼하고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이항복은 즉시 달려가 이덕형의 시신을 직접 염하고 만사와 묘지명을 지어 애절함을 표현하였다.

먼저 이항복의 만사이다.

궁벽한 산에 떨어진 신세라서 말을 삼가려 했는데
훌쩍훌쩍 남몰래 한원군(이덕형)을 곡하노라
애사(哀詞)에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야박한 풍속이 남을 엿보아 말 만들기 좋아하기 때문이네

다음은 묘지명의 일부이다.

이제 와서 크게 한이 되는 것은 모후(母后)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명보(明甫 이덕형)가 급히 공격하려는 것을 내가 때를 기다리려고 하여, 마침내 명보가 나의 의논을 좇아 중지하였던 것이다. 내가 먼저 패하여 물러나자 명보가 고립되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서 지사(志士)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니, 내가 명보를 그르침이 많았도다.

(중략)

한음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이것 때문에 참소를 당하여 죄를 입었고, 또한 그 때문에 후세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곡(哭)을 그치고 그의 행적을 기록하려니, 슬픔을 글로 다 형용할 수 없구나. 그의 덕으로 나의 속됨을 덮고 그의 말을 훔쳐 내 흠을 숨기면서 이 글을 써서 친구의 무덤에 묻노라.

한음 이덕형. 그는 광해군 시대에 혼란한 정세를 만나 뜻이 꺾이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올곧은 성품의 명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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