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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삼마태수 송흠,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칼럼] 조선 유일 父子 청백리 삼마태수 지지당 송흠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뉴스24 기사입력  2015/09/01 [07:22]
▲     © 뉴스24
전남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관수정(觀水亭)을 찾았다.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조선 중종시절 청백리 송흠(宋欽1459∼1547)이 말년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에는 송흠이 지은 시가 걸려 있다.
물을 바라보고 우뚝하게 지은 집  여름에도 시원한데
노부(老夫)는 날마다 난간에 기대어 선다.
골짜기는 두 시냇물이 모두 차지하니
어찌 용문(중국의 명산)의 팔절탄(중국의 승경)을 부러워하리.
고요한 그림자 물에 잠기니 참으로 즐길 만하고
날 개이면 비에 씻긴 모습 즐겨보리
천만가지 모습들이 모두 눈을 어지럽게 하는데
맑은 물결 떠다가 내 속마음을 씻고 싶네.
문득 노자  <도덕경> 제8장의 ‘상선약수 上善若水’가 생각난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故幾於道   


‘다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물의 철학. 최근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생일 선물로 준 친필 편액도 바로 <상선약수>이다.



청백리를 일곱 번이나 한 송흠의 별호는 삼마태수(三馬太守)이다. 목민관이 새로 부임지로 갈 때는 전임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이었는데 그는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본인이 탈 말, 어머니가 탈 말, 아내가 탈 말, 각 한 필이었다. 송흠의 어머니는 101세까지 사시어 송흠은 항상 모친을 모시고 다녔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 6조  제3조 제가(齊家 가정을 다스림)에도  송흠의 삼마태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효헌공(孝憲公) 송흠이 수령으로 부임할 적마다 신영마(新迎馬) 3필뿐이었으니, 대개 공이 타는 말이 1필, 어머니와 부인이 각 1필씩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 하였다.


송흠은 정부 예산도 절약하였다. 여산군수로 있을 때는 호산춘이란 술을 손수 빚어 접대비용을 줄이기도 했고, 호산춘 담그는 법을 한글로 적어서 부녀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송흠이 86세이던 1544년, 왜구가 경상도의 사량진 포구를 습격하여 수군들이 죽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송흠은 나라를 걱정하고 병조판서를 한 경험을 살려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왜구를 막으려면 수군을 보강하고, 판옥선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1555년에 판옥선이 만들어졌다.


송흠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지지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노자의 <도덕경> 제44장에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하였다.
 
한편 관수정 뒷산에는 송흠의 묘소가 있다. 묘지명은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1629-1714)이 1683년에 지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노래자는 갓난아이처럼 울었고     萊子嬰兒之啼
양백기는 밤중에도 아는 자가 있다고 했으며   伯起暮夜之知
소부는 동문밖으로 물러 나고     疏傅東門之退
노공은 낙양의 모임을 만들었네   潞公洛社之會
세상에 드문 미담인데         曠世美事
공이 실로 모두를 겸비하였네  公實兼備


노래자(老萊子)는 중국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70세의 나이에도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는 인물이다. 송흠도 99세의 어머니를 위하여 76세의 나이에 전라감사 벼슬을 사직하고 모친이 101세에 별세할 때 까지 극진히 봉양하였다. 그의 시호가 효헌공(孝憲公)이었으니 얼마나 효의 근본이 되는 인물인가!


양백기(楊伯起)는 후한(後漢) 때의 재상 양진을 말하는 데, 그는 일찍이 동래태수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천거를 받았던 창읍령(昌邑令) 왕밀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와서 금(金) 10근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양진은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하고 금을 물리쳤다 한다. 이를 4지 四知라 하며 중국의 청렴규범이 되었다.


소부는 한나라 소광(疏廣)이다. 선제(宣帝)때 황태자의 태부(太傅)로 있었는데,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이미 높아졌는데도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사퇴하고 장안의 동쪽 성문으로 나가 고향에 내려갔다.



송흠은 1541년에 우참찬으로 부름을 받아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중종에게 사직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이 때 송흠은 삼정승 이하 여러 대신들의 특별한 전별을 받았다.


노공(潞公)은 송나라 때 장상(將相)을 지낸 문언박의 봉호이다. 사마광, 부필 등 13인과 함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는 노인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는 1543년에 전라감사 규암 송인수가 기영정(耆英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10개 고을의 수령을 모아 놓고 송흠 등 촌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을 말하고 있다.


송흠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 일에는 충성하고 청렴하며, 그의 호 지지당(知止堂)처럼 물러날 자리를 알고 그칠 줄 알았다. 그의 아들 송익경도 청백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