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겨울에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1762 -1836)은 1808년 봄에 다산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1809년과 1810년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하였다. 게다가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죽은 시신들이 언덕을 메꾸었다.
이러함에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수탈만 일삼았다. 다산은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탐학만 일삼는 아전을 고발하는 <용산리(龍山吏)> · <파지리(波池吏)> · <해남리(海南吏)>등 3리(三吏) 시를 지었다. 마치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신안리(新安吏)> · <동관리(潼關吏)> · <석호리(石壕吏)> 3리 시를 지었듯이. 1)
그러면 다산이 지은 3리 시를 살펴보자. 먼저 <용산리>이다. 1810년 6월에 지은 이 시는 용산촌에 들이닥친 아전의 횡포를 고발한 시이다. 강진군 도암면 용흥리 용산마을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용산촌인 것 같다.
다산은 ‘용산리’ 시를 지으면서 두보의 ‘석호리’시의 운을 차운하였다.
아전들이 용산 마을에 들이닥쳐 / 吏打龍山村
소를 뒤져 관리에게 넘겨주니 / 搜牛付官人
그 소 몰고 멀리멀리 가는 꼴을 / 驅牛遠遠去
집집마다 대문 밖에서 보고만 있어 / 家家倚門看
사또님 노여움만 막으면 그만이지 / 勉塞官長怒
약한 백성 고통을 그 누가 알아주리. / 誰知細民苦
유월에 쌀을 찾다니 / 六月索稻米
고달프기 군대생활보다 더하다네. / 毒痡甚征戍
좋은 소식은 끝내 오지 않고 / 德音竟不至
수많은 생명 다 죽게 되었으니 / 萬命相枕死
제일 불쌍한 건 가난한 백성이라 / 窮生儘可哀
죽는 편은 오히려 더 낫다네 / 死者寧哿矣
남편 없는 과부 / 婦寡無良人
자식 손자 없는 영감 / 翁老無兒孫
소만 바라보며 우노라니 / 泫然望牛泣
눈물 떨어져 옷 다 적신다네 / 淚落沾衣裙
마을 모양새가 이꼴인데 / 村色劇疲衰
아전 놈 왜 가지 않고 앉아있을까 / 吏坐胡不歸
쌀독 바닥난 지 이미 오래거니 / 甁甖久已罄
무슨 수로 저녁밥 지을 것인가 / 何能有夕炊
죽치고 앉아 남 못살게 하는 놈 / 坐令生理絶
동네마다 목메어 우는 굿이라네. / 四隣同嗚咽
소를 잡아 권문에 바치면 / 脯牛歸朱門
거기에서 인재가 드러난다네. / 才諝以甄別
흉년에 먹을 것도 없는 마을에 들이닥쳐 세금으로 소를 가지고 가는 아전. 죽치고 앉아 밥 얻어먹고 가려는 아전의 횡포가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파지리’ 시이다. 파지 마을이 어디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강진 근처 어디리라. 이 시는 아전들이 파지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에 농부라고는 없는데 애꿎은 고아와 과부를 결박하여 성 앞에 세워놓았다. 또한 도망 못간 선비 한 사람을 잡아서 나뭇가지에다 거꾸로 매달고 마을 사람들에게 세금 독촉을 하고 있다.
마지막 시는 ‘해남리’이다. 다산은 전염병을 피해 해남으로 갔다. 그런데 여기에도 세금 독촉 관리가 덮쳐서 세금을 걷어가고 있다. 이 시에도 혹독한 아전에 대한 분노가 잘 나타나 있다.
정약용은 1808년 겨울에 큰 아들 학연에게 부치는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오늘날에 있어 시율(詩律)은 마땅히 두보(杜甫)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의 시가 백가(百家)의 으뜸이 되는 까닭은 《시경》3백 편에 있는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3백 편은 모두 충신, 효자, 열부(烈婦), 양우(良友)들의 측은하고 아픈 마음과 충후한 마음이 형상화된 것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은 것이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은 것이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그렇다. 시란 음풍농월이 아니다.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개탄해야 시이다. 사회시 社會詩야 말로 진정한 시이다.
1) ‘석호리’ 시는 안녹산의 난 때 두보가 석호촌에 투숙하였는데, 하양의 역사(役事)를 위하여 징발에 끌려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한편 ‘신안리’시는 757년에 반란군에게 대패한 관군이 신안 마을에서 보충병을 뽑아 출정시키는 장면을 적은 시이고, ‘동관리’ 시는 동관의 성을 쌓는 병사들의 고초를 적은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