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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염리(廉吏)와 삼염(三廉)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염리(廉吏)와 삼염(三廉)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廉生明), (廉生威), (廉則剛)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中

廉(렴)이란  ‘청렴, 검소, 곧고 바름’이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 漢字이다. 염검(廉儉), 염우(廉隅), 염치(廉恥)는 곧고 올바른 행실, 절조(節操)있고 검소한 행동거지로서 염리(廉吏)의 행동준칙이었다. 


 옛날부터 염리(廉吏)는 ‘청렴하고 정의를 지키는 관리 淸廉守正的 官吏’라는 뜻으로, 중국의 한(漢) 나라 문제(文帝) 12년(서기전 168년)에 “염리는 백성의 표상(表象)이다.”라고 하면서 포상을 하였다.

중국 동한(東漢) 때 양속(羊續)이라는  관리가 누군가 선물로 들고 온 생선을 건드리지도 않은 채 마루 앞에 걸어두고서 다른 사람이 또 선물을 들고 오면 그것을 말없이 보여줬다는 양속현어(羊續懸魚)라는 성어, 뇌물이 성행했던 명(明)나라 조정에서 “상관에게 바칠 뇌물은 없고 두 소매에는 깨끗한 바람 뿐”이라고 했던  우겸(于謙)의 양수청풍(兩袖淸風)이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염리의 행동거지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청렴한 것은 수령의 본무요, 모든 선의 근원이며 덕의 바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염 廉에 관한 글은 다산 정약용이 영암군수 이종영(1791-1836)에게 보낸 글이 압권이다. 이종영은 정약용의 친구 이재의(1772-1839)의 아들인데 1812년에 영암군수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였고 1816년에 평안도 함종부사로 영전하였다. 1)

그러면 정약용이  영암군수 이종영에게 보낸 편지 글을 읽어보자.  

옛날에 소현(중국 절강성에 있는 현)의 현령이 부구옹(한나라 초 재상)에게 고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부구옹이 이르기를 “나에게 6글자의 비결이 있는데, 그대는 3일 동안 목욕 재개를 하여야  들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령이 그 말과 같이 하고서 청하니, 옹이 먼저 한 글자를 주었는데 ‘염 廉’자였다. 현령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한 글자를 주기를 청하니, 옹이 또 한 글자를 주었는데 ‘염’자였다. 현령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다시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옹이 마지막으로 한 글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역시 ‘염’자였다.  

현령이 다시 두 번 절하고 “염廉이 이렇게 중요합니까?”라고 말하니, 옹이 말하기를 “ 자네는  그 중 한 글자는 재물에 실행하고, 또 한 글자는 여색 女色에 실행하고, 또 한 글자는 직위에 실천하라”고 하였다. 

현령이 말하기를 “여섯 글자를 모두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옹이 말하기를 “또 목욕재개를 3일 동안 하여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현령이 그 말에 따라 하니, 옹이 말하기를 “그대는 듣고자 하는가. 염 · 염 · 염이다”라고 했다.

현령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중요합니까?”라고 하니, 옹이 말하기를 “앉으라, 내가 그대에게 말하리라. 청렴함은 밝음을 낳나니 (廉生明) 사람이 그 마음을 숨기지 못 할 것이요, 청렴함은 위엄을 낳나니(廉生威) 백성들이 모두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청렴함은 곧 강직하게 되니(廉則剛) 상관이 감히 가벼이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데 능히 다스리지 못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현령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허리띠에 써서 떠났다. 

정약용은 목민관의 도 道는 첫째 청 淸이요, 둘째는 신 愼이요, 셋째는 근 勤이라 하였다. 청은 청렴이요, 신은 삼가는 것이며 근은 부지런하게 백성을 살피는 것이다.  그중에도 청렴이 가장 지켜야 할 윤리강령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온통 썩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직자들이여! “청렴함은 밝음을 낳고 (廉生明), 청렴함은 위엄을 낳고(廉生威), 청렴함은 곧 강직하게(廉則剛)된다”는  다산 정약용의 말을 단 한번이라도 새겨들을지어다.

1) 이재의는 아들 이종영이 영암군수로 근무하자, 1813년 여름에 거처를 영암으로 옮겼다. 그는 1814년에 강진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을 만나 교제하였다. 그는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남인인 정약용과 평생 교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