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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호조서리 김수팽,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칼럼> 호조 서리 김수팽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원칙 지키고 눈치 안보고 청렴하게 일하는 관료가있어야 나라가 산다

6.5자 경향신문에서 장덕진 서울대 교수의 유능한 관료, 무능한 국가칼럼을 읽었다. 글을 읽으면서 영조 때 호조서리 김수팽이 떠올랐다 

그는 기개가 뛰어나고 대장부다운 절조가 있었다. 하루는 김수팽이 호조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대전 내관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왕명이니 십만 냥을 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시간은 벌써 한 밤중이었다. 수팽은 판서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고 거절하였다. 대전 내관이 결재 없이 즉시 내놓으라고 여러 번 호통쳤으나 수팽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내관이 빨리 가서 판서의 결재를 받아오라고 하자, 김수팽은 황소걸음으로 판서의 집으로 가서 결재를 받은 후에 비로소 돈을 내주었다. 그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궁궐에 들어간 내관은 왕명을 업신여긴 것을 임금에게 고하고 그를 처벌하라고 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조 임금은 빙그레 웃고는 직무에 충실한 수팽을 오히려 가상히 여겼다.  

또 하루는 김수팽이 결재를 받으러 판서 집에 갔다. 판서는 마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김수팽이 결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판서는 머리만 끄덕일 뿐 여전히 바둑만 계속 두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판서가 바둑을 두고 있자, 수팽은 섬돌에 뛰어올라가 손으로 바둑판을 쓸어버리고, 뜨락으로 내려와 아뢰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 일은 늦출 수가 없습니다. 결재를 청하오니 다른 서리를 시켜서 결재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사직하고 나가 버렸다. 이러자 당황한 판서는 김수팽을 다시 불러서 결재를 하고는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한편 어느 날 김수팽은 선혜청 서리인 동생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당에 동이들이 줄지어 있고, 검푸른 염료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김수팽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동생에게 물었다. 아우는 그에게 아내가 푸른 빛 염색업(染色業)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김수팽은 노하여 항아리를 모두 엎어 깨뜨려 버렸다. 엎어진 동이에는 푸른 염료가 콸콸 흘러 도랑에 가득 찼다.  

이윽고 수팽은 동생을 크게 꾸짖었다. “명색이 나라에서 녹을 받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 못하고 부업을 한단 말인가? 이것을 업으로 하면 저 가난한 사람들은 장차 무엇을 생업으로 한단 말인가?”  

화가 우봉 조희룡(1789-1866)'호산외기(壺山外記)' 책에서 김수팽을 이렇게 찬()하였다.
"그 사람을 머리에 떠 올리니, 마치 맑은 바람이 숙연히 사람에게서 스며오는 것 같다. 들으니 그가 어렸을 때에 집안이 가난했는데, 그 어미가 몸소 불을 때며 밥을 짓다가 부뚜막 밑에 묻혀 있는 금덩이가 담긴 항아리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어미는 즉시 전과 같이 묻어버리고는 그 집을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가 버렸다. 한 참 뒤에야 비로소 남편에게 말했다. '갑자기 부자가 되면 상서롭지 못하답니다. 그래서 금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에 그대로 눌러 있었다면 금항아리가 눈에 항상 아른거렸겠지요.' 이런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수팽 같은 아들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팽 같이 원칙을 지키고 눈치 안보고 청렴하게 일하는 관료가 있어야 이 나라가 산다. 그래야 메르스 사태로 불신을 사는 정부, ‘위기관리 후진국신세를 면할 것이다.

 
<김세곤칼럼> ‘한말 호남의병의 길’ 순례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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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yug42@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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