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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과 간양록

강항 기념사업회 강의 - 영광군 2015.4.2 한전문화회관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지금, 강항선생을 이야기 하는가?

 

                                           2015.4.2. 14시 30분 -15시 영광군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세 가지 질문

 

(1) 우리는 수은 강항(姜沆 1567-1618) 선생을 얼마나 아는가?

(2) 우리는 <간양록>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3) 강항 선생 현창사업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2. 수은 강항(1567-1618) 선생은 누구인가?

 

. 강항의 생애

 

o 1: 1567-1597 (1592 임진왜란 시 영광 수성 활동, 1593년 문과급제, 1596년 형조좌랑)

 

o 2: 1597.9 1600.5 (일본에서 포로 생활)

 

1597.9.23.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일본 수군에게 잡힘. 일본에 끌려가 일본 시코쿠(四國)지역의 오즈성(大津城 : 에이메현 愛媛県 오즈시 大洲市)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강항 159888일에 오즈성을 떠나 911일에 오사카에 도착 하였다. 이후 그는 교토 후시미(伏見)에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아카마쓰 히로미치 등을 만났고 160042일에 교토를 떠나 519일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3: 1600-1618

 

같은 고절 苦節과 애끓는 심정을 세상에 널리 알려 표창하여 주기는커녕 도리어 깎아내리고 매장하려 들었으니 천하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이건 너무도 심한 일이다. (1656년 홍문관 교리 유계(兪棨 1607-1664)<간양록>에 붙이는 글)

 

. 강항 선생에 대한 평가

 

(1) 포로 생활 중에도 나라를 생각하다

 

o 선조에게 적중봉소를 보냄. (1599.4.15.자 선조실록)

* 강항은 1598, 1599년에 세 차례 일본에서 선조에게 봉소하였는데 왕건공 편에 보낸 것이 조정에 도달함.

 

(2) 절의를 지키다.

 

o 1772(영조 48) 영조가 수은집을 읽고 선생의 절의를 한소무, 송문산과 같다고 칭찬함. 7대손 재윤을 도사로 등용하다.

 

o 1607년에 회답겸쇄환사로 일본에 간 부사 경섬(정사는 여우길)<해사록>에서 강항의 절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인들의 말에 의하면, 강항이 포로 되어 온 지 5년 동안 자신의 바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의관도 바꾸지 않고 방에 조용히 앉아 책이나 보고 글을 짓기만 일삼았다. 그는 여태까지 왜인들과 상대해서 입을 연 적이 없었다.

 

(3) 일본에서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다.

 

KBS 역사 스페셜 2002316, “임란 포로 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

 

3. 우리는 <간양록>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간양록 看羊錄 (별칭 巾車錄)은 정유재란 때 강항(姜沆)이 일본에서의 포로생활 기록을 모은 책이다.

 

원래 강항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이를 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효종 7)에 간행될 때, 제자들이 간양록이라고 고쳤다. 이것은 한()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다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수은집(睡隱集)의 별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尹舜擧)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규장각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은 5가지인데,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 (적중문견록), 포로들에게 알리는 글(고부인격 告俘人檄), 귀국 후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되어 있다.

 

* <간양록>은 왜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까지 언급하고 있는 충절의 기록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분서(焚書)의 화를 입기도 하였다.

 

간양록은 당시의 여러 일본견문록 중에서 비교적 상세하고 체계적인 서술서로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일본 연구에 많이 인용되었다.

 

한편 간양록은 일본에서 번역되기도 하였는데, 1719(숙종 45)에 일본에 간 신유한은 <간양록>이 오사카에서 출간 된 것을 알고는 적에게 기밀이 알려진 것을 통탄하고 있다.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일본의 기록을 기록한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이 오사카에서 발간된 것을 통탄하고 있다. 그는 국가기강이 엄하지 못하여 부산왜관의 통역들이 사적으로 거래하여 일본에 전해졌음을 한심해 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간양록은 3종이다. 이을호가 번역한 간양록(서해문집)과 북한 국문학자 김찬순이 번역한 간양록 (겨레고점전문학선집15, 보리 출판사),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DB ‘해행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4. 강항 선생 현창사업의 현주소는?

 

. 화려한 과거, 봄날은 가다?

 

(1) 영광군 내산서원과 주변 유적지 사업 정화

 

(2) MBC 드라마 <간양록> (19809-12월 방영)

 

-표재순 연출, 신봉승 극본, 출연 이정길 · 김영애 · 최불암 · 김혜자 등

- 조용필이 부른 노래 간양록 (1980, 신봉승 작사, 조용필 작곡)

 

(3) 2002KBS 역사스페셜 (유인촌 해설)

 

이 방송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선비 강항이 일본에 무엇을 남겼는지를 살피고 있다. 먼저 일본 오즈시의 강항 현창 사업을 소개하고 있다. 오즈시는 시민회관 앞에 홍유 강항 현창비 鴻儒 姜沆顯彰碑를 세웠다. 또한 오즈시 초등학교 사회과목 부교재에 조선 선비 강항을 수록하였다. 부교재에는 강항이 31살 때 포로로 오즈성에 압송되어 왔으며, 그때 유교를 가르쳐 일본 유교의 근본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50명의 회원이 참가한 강항 연구회활동도 활발하여 책도 발간하고, 강항의 발길이 닿은 곳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강항이 일본에 처음 도착한 나가하마()해안에서 오즈성까지 나무 표시판을 세우고 그 옆에 강항의 한시도 새겨 놓았다. 오즈시 사람들의 강항 기리는 정신이 참으로 놀랍다.

 

한편 강항은 후시미에서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그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세이카는 에도 시대 주자학의 비조 鼻祖이다.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대학두 大學頭로 활동하였고 자손들이 대학두를 세습하였다. 하야시 라잔은 사상계의 쇼군으로 불렸다.

 

에도 막부는 사무라이들에게 신분질서를 확립시키는 주자학을 가르쳐 270년간 도쿠가와 쇼군 시대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강항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혹은 제2의 왕인 王仁 으로 일본에서 추앙받고 있다.

 

이 방송은 내레이터 유인촌의 멘트로 끝맺는다.

 

우리의 선조임에도 우리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연구되어 진 인물,

우리보다 일본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인물. 이제 더 이상 우리 역사 속에 묻힌 인물로 머물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강항을 만나는 이유입니다.

 

 

. 부끄러운 오늘, 외면당하는 강항 선생

 

o 우리는 1980년대나 2000년대 보다 강항 선생을 훨씬 모르고 있고, 강항 선생에 대한 현창사업도 활발하지 않다.

 

- 영광 내산서원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영광군 학생들의 답사도 뜸하다.

- 강항에 대한 평전 한 권 없고, 홍보도 부진하다.

- 일본과 비교하여도 우리의 현창사업은 너무 초라하다.

 

o 인근 지역의 역사 대중화 사업은 교훈을 준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봉서원 (고봉 기대승 1527-1572) - 고봉학술원을 만들어 학술활동을 하였지만 대중화는 미흡, 2008년 이후 대중화에 성공. 서원 개방.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생생사업 활발, 고봉문화제, 고봉학술회의.

 

* 필자도 <고봉, 퇴계를 그리워하다> -->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를 저술 (광산구청 홈피에 연재)

- 장성군 청렴문화 교육 : 청백리 송흠과 박수량을 교육자원화 (박수량 백비와 송흠의 관수정), 201110월부터 시작 - 2014년에 3만 명이 교육을 받음. 평생교육센터(공무원 조직) -- 지역경제에 효자 노릇

 

* 필자도 <청백리 송흠> <청백리 박수량>을 장성군청 홈피에 연재하고 책자로 발간

 

 

5. 어떻게 할 것인가?

 

. 내부 역량부터 키우자.

 

o 내산서원 활용 극대화부터 하자. 영광군, 영광군 교육청, 강씨 문중이 나서서 강항 선생 알리기부터 하자.

 

- 주말에는 기념관 문도 열어 놓고, 문화관광 해설사도 배치하자.

1회 정도는 서원 강당에서 강항 알리기 강좌를 열자. (유림들부터 관심을 유도하자)

 

- 홍보를 강화하자.

 

o 영광군청 홈피에 강항 평전을 연재하자(원고료 7백만 원 투자).

 

- 광산구청 기대승 홈피 (2천회 이상)

 

* 영광군청에서 초기 투자는 하여야 한다.

 

o 문화재청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라. (2016년 서원 프로그램)

o 일본과의 교류도 재개하여야 한다.(한국 학생대표단이 일본 오즈시를 답사하고 일본 오즈시 학생들이 영광군 답사)

 

. 지속적으로 투자하여야 한다.

 

강항 현창 사업은 지역경제와 연계하여야 한다. 역사 대중화를 하여야 한다. 영광의 문화자원과 연계시켜, ‘강항 투어리즘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1회용이어서는 안 된다. 꾸준히 투자 하여야 한다. 조직을 갖추고 재정 투자를 하여야 한다.

 

 

 

 

6. 마치면서

 

o 2017년은 강항 선생 탄생 450, 2018년 강항 선생 서거 400년이다.

o 다시 시작하자.

 

 

(참고문헌)

 

o 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한길사, 2005

o 강항 지음이을호 옮김, 간양록, 서해문집, 2005

o 강항 씀, 김찬순 옮김, 간양록, 보리, 2006

o 강항, 국역 수은집, 전라남도, 1989

o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국립진주박물관, 2010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한국고전번역원, 해행총재,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o 호사카 유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