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29일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일제의 무력 탄압은 거세었다. 일제는 서울 북부 지사교 정훈모에게 압력을 넣어 친일로 돌아서게 만든 다음 대종교를 탈퇴하게 하고, 일본의 국조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단군이 형제 사이라는 터무니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친일파 윤택영·이재극 등을 내세워 두 국조의 사당을 지어 받들게 했다. 이는 민족종교 대종교를 약화시키려는 일제의 교활한 술책이었다. 1)
1910년 11월에 나철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에 지사(支司)를 설치하였고, 1911년 7월에는 강화도 첨성단을 참배하고 평양과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록 청파호를 답사하였다.
이후 나철은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하여 항일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1914년 5월에 나철은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대종교의 총본사를 만주의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로 옮기고, 총 본사 산하에 동서남북 4도 본사(四道本司)를 두었다. 각 본사의 관할 범위를 보면 대종교의 광대한 역사의식이 잘 드러난다.
동도본사의 관할지역은 동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함경도였고, 서도본사는 남만주와 중국 몽골 · 평안도였다. 남도본사는 전라 · 경상 · 충청도와 강원 · 황해도였고, 북도본사는 북만주 흑룡강이었다.
각 본사 책임자는 동도본사는 서일(徐一), 서도본사는 신규식 · 이동녕이었고, 남도본사는 강우, 북도본사는 이상설이었다. 이러하자 대종교는 만주에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신도가 30만 명으로 늘어났다.
대종교의 교세 확장에 일제는 위협을 느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에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을 반포하였다. 나철은 급히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포교규칙’에 준하여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신도 · 불교 · 기독교는 종교로 인정하면서,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거부하였다.
더구나 조선총독부는 1915년 10월에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시키고, 국내에서의 종교활동을 금지시켰다. 심지어는 나철을 구속하겠다고 위협했다.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15일에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데리고 단군이 은거했다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갔다.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3일 동안 단식 수도할 것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자 수행원이 문을 여니 그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대종사 나철은 ‘삼십만 교도에게 격려하는 글’과 ‘순명 殉命 3조’등 3종의 유서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끝까지 나라를 찾을 것과 활동무대를 백두산 언저리로 옮기라는 유언이 있었다.
천조(天祖)의 큰 도(道)를
널리 빛내지 못하며
신족(新族)이 근하게 됨을
구제하지 못하고
오늘의 회욕(悔辱)을 가져오게 됨에
여기서 한오리 목숨을 끊어
순(殉)하는 것이다.
- 홍암 나철 선생의 유언
나철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청파호 옆 백두산 가는 길에 안장되었다. 민족종교 대종교를 통하여 항일운동을 한 나철. 나라는 망했어도 민족혼은 불타고 있음을 역설한 나철. 그는 정녕 독립운동의 아버지였다. 1962년에 정부에서는 나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1) 정훈모는 단군교라는 명칭을 고수하기 위하여 나철과 결별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2)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나철의 활약상을 일부 드러냈던 작가 조정래는 나철의 생애를 다룬 장편 역사소설 이병천 작 <신시의 꿈> 추천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족적 인물들이 많이 탄생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한 사람, 그가 바로 나철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나철을 홀대해 왔다. 그러나 이제 작가 이병천의 능숙하고도 신들린듯한 장인의 솜씨를 타고 나철은 현란하게 우리 앞에 부활한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