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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와 호남

기산도, 을사오적을 처단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글 , 남도일보

김세곤 칼럼기산도, 을사오적을 처단하다

오치남 기자  |  ocn@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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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8  15:4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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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 을사오적을 처단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현직 고관들은 을사늑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 상소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항의 표시로 순국을 선택하였다. 11월30일에는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자결하였고, 12월1일에는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가, 12월2일에는 영암출신 학부주사 이상철이 음독자살하였으며, 홍만식·송병선 등의 순국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중국인 반종례는 민영환의 유서를 읽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의열 투쟁이 일어났다. 의열투쟁의 선봉은 장성 출신 기산도(1878∼1928)였다. 그는 노사 기정진의 친척인 기재의 아들이었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의 종손자였으며, 1907년에 구례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의 사위였다.

그런데 유학자 집안 출신인 기산도는 서울 상동교회에 드나들며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상동청년회원들은 집단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상소투쟁은 일본 경찰의 저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기산도와 몇몇 동지들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거사에 나섰다. 28세의 지방출신 기산도가 행동대장으로 나섰다. 이들은 먼저 군부대신 이근택의 아버지 이민승을 죽이기로 하였다.
11월23일 밤에 기산도는 이근철, 이종대 등 7인과 함께 각각 칼과 총, 쇠망치를 들고 이민승의 집에 잠입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기산도는 박종섭·박경하·이종대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과 단도를 각자 지니고 을사오적의 동태를 살폈다. 마침 종로에서 이근택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칼로 찔러 죽이려 했으나 경호가 심하여 실패하였다.

길거리 암살에 실패하자 기산도는 이근택의 집에 들어가 암살하기로 하였다. 1906년 2월 16일에 기산도는 이근철, 이범석과 함께 이를 결행하였다. 남들이 알아 볼 수 없도록 변장을 한 기산도 일행이 계동(桂洞) 마루턱 이근택의 집에 다다른 것은 16일 밤 12시경이었다. 이에 앞서 이근택은 오후 7시 경에 별실로 퇴궐한 후 8시 경에 손님 여섯 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후 11시 경이 되어서야 침실로 들어가서 모로 누었다. 그의 첩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순식간에 담을 뛰어 넘은 기산도 등 자객 3명은 곧 바로 이근택의 침실로 들어가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잡고 다른 한 명은 칼로 이근택을 찔렀다. 칼을 맞자 이근택은 황급히 방안의 촛불을 껐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객들은 이근택의 머리와 왼쪽 어깨와 오른쪽 팔과 등을 비롯해 10여 곳을 난자하였다.

이근택과 그의 첩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자 하인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기산도 일행 중 한 명이 하인의 배와 얼굴 등 4곳을 칼로 찔렀다. 이 때 설렁줄 소리에 집 안팎을 경비하던 군인과 경찰 10명이 즉시 달려왔다. 곧 일본 헌병들도 도착하였다. 그러나 기산도 일행은 이미 남쪽 벽돌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도망한 뒤였다.

이근택 암살 사건은 곧바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李氏逢刺(이씨봉자)’란 제목 하에 크게 보도하였다.
기산도의 의열투쟁은 을사오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을사오적들은 불안에 떨었고, 병사와 경찰들은 총을 메고 이들의 집을 삼엄하게 지켰다.

그런데 기산도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기산도는 이근택의 집에 잠시 머문 적이 있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인조수염으로 위장했으나, 의거 과정에서 인조수염 하나가 대청마루에 떨어졌고 그것이 단서가 되었다.
인조수염을 판매한 상점 주인이 이근철을 범인으로 증언함에 따라 2월18일에 기산도를 비롯한 이근철·이범석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기산도 체포를 계기로 의열지사의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전 주사 김석항, 전 현감 김일제 등 수 십 명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1906년 5월 13일에 재판을 받았다.
기산도는 2년 6개월, 이근철은 1년6개월 징역형을 받았고, 거사를 총괄한 김석항과 기획한 전 현감 김일제는 3년 징역형을 받았다. <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