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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5월, 금남로에 섰다. 세월호 참사, 서울지하철 추돌사고, 도올 김용옥의 글로 지금 대한민국은 잿빛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1980년 5월을 회고한다. 동학농민혁명을 생각한다. 금남군을 추모한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점령하였다. 아침부터 라디오에서는 ‘공무원 조기출근’ 방송이 반복되고 있었다. 전남도청 공무원이었던 필자는 7시 반에 출근하여 사회과장과 함께 도청 안을 다녔다. 뒷마당에는 여러 구의 시신이 피투성이로 누워 있었고, 젊은 학생 옆에서 흐느끼는 누나의 통곡을 들었다. ‘oo야, 나가지 말라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2층 회의실에는 완전 나체인 채로 불에 탄 듯한 시신 한 구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도청을 끝까지 사수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였다.
5월27일 밤에 숙직을 하였다. 10여구의 시신과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 5월28일 아침에 도청에 있는 시신들은 청소차로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처음에 청소차는 조의 표시 없이 운구하였다. 이를 본 시민들이 ‘사람이 쓰레기이냐’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이윽고 청소차에는 하얀 천이 깔리고 운구가 계속되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서 치러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 에 헌정된 ‘임을 위한 행진곡'.
시대가 가사를 쓰고 역사가 곡을 붙인 이 노래는 5·18 기념 곡 지정 여부를 놓고 논쟁 중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2주갑, 즉 120년이 되는 해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하여 시작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하는 등 개가를 올렸으나 공주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였다.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은 농민군이 100만 명이나 되었으나 10만 명 넘게 희생되었다.
순창에 피신해 있다가 현상금에 눈이 먼 측근의 밀고로 일본군에 붙들린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에 처형되었다. 나이 41세였다. 녹두꽃(전봉준)은 떨어졌고 청포장수(조선 민중)는 울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하였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종이 청나라에 군대요청을 하지 않았어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까. 왜 고종은 외세에 의존하여 민란(필자가 고등학교 때는 동학란으로 배웠다)을 진압하려 하였을까.
한편, 금남군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금남로의 주인공인 금남군 정충신(1576~1636)을 아는 광주 시민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전이고 어머니가 여종이어서 그럴까. 그의 묘소와 사당이 광주에 없어서일까. 그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금남군 봉호를 받았음에도 광주에서 소외받고 있다. 광주공원에 있는 도원수 권율장군 비에 이름 한 줄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다산 정약용은 정충신을 칭송하였다.
다산의 ‘광주를 다시 지나며(重過光州)’ 시이다.
‘매번 광산부를 지날 때마다
오래도록 정금남 선생을 생각한다네.
태어난 곳은 좁게 뻗어 작은 곳이어도
재능은 순 임금의 신하에 뒤지지 않는다오.
옛 사당에는 어지러운 세상의 기운 서리고
터만 남은 곳에서 어르신들 정충신 이야기하네.
웅장하구나! 서석산이여.
뛰어난 인물을 길러냈도다.’
지금 광주는 광주정신이 빛바래고 있다.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광주가, 민주·인권·평화의 광주가 힘들어 하고 있다. 외부에서는 광주 배제와 폄하가 확산되고 있고, 내부에서도 광주광역시장 선거를 앞두고 논란이 격렬하다.
김한길·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윤장현을 광주광역시장 후보로 전략 공천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강운태 시장과 이용섭 국회의원은 ‘광주정신을 모독하고 광주시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고 탈당하였다.
금남로에서 광주정신을 다시 생각한다. 아, 오월 금남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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