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전라도 의병들 다시 나서다 (1)
- 구례 석주관 칠의사
구례 석주관 칠의사 전적지 戰蹟址를 간다. 석주관 칠의사는 전남
구례군에서 경남 하동군으로 가는 섬진강 길옆에 있다.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와 내륙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안음의 황석산성 ․ 진안의 웅치 ․ 운봉의 팔량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을 통하는 4대 관문의 하나로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정유재란 초기에 가장 심한 참화를 입은 구례지방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전적지 입구에서 칠의사 七義祠 사당으로 들어간다. 외삼문을 지나니 동재와 서재 건물이 두 개 있다. 건물 이름은 재명각과 숭의각이다. 다시 내삼문을 지나 칠의사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앞쪽에 위패가 8개, 옆에 2개 놓여 있다.
앞의 위패 8개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현감 이원춘과 석주관 전투에서 전사한 왕득인 등 7의사 위패이다. 옆에 있는 두 개의 위패는 칠의 종군 의병과 의승병의 신위이다.
8월7일에 왜군은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진군하면서 구례지역을 초토화하였다. 16일에는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전주를 무혈 입성하여 전라도를 완전 장악하였다. 9월 초부터 고니시의 군대는 순천에 주둔하였고,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장성, 나주를 초토화하고 해남으로 내려갔으며 다른 부대들로 전라도 지역에 주둔하였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전라도에 50개 부대가 바둑판처럼 깔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하였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남원성 함락과 더불어 남원 ․ 구례 ․곡성 일대는 전쟁 피해가 극심하였다. 백성들은 산 깊은 곳으로 숨거나 보따리를 싸고 강원도 등으로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심 넘치는 선비들이라도 의병을 일으킬 엄두를 못 냈다. 한편으로는 의병 기피현상도 있었다. 1596년에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 김덕령 옥사사건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9월 하순에 구례 석주관 의병 항전이 일어났다. 구례현 남전리 출신 선비 왕득인이 50여명의 향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왕득인은 죽기를 각오하고 매복에 의한 기습전이나 산곡간의 바윗돌을 굴려 내리는 석탄공법(石彈攻法)으로 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조총을 가진 왜적의 대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의병들은 석주관에서 모두 순절하였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왕득인이 싸운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로 보인다. 이들은 순천에 왜교성을 쌓고 구례 ․ 광양 ․ 승주 ․ 보성 일대를 분탕질하고 있었다.
한편 10월 중순에 명나라 군대가 전주에 당도하여 임실 ․ 남원 ․ 곡성 등의 왜적을 추격하였다. 그런데 명군은 구례에는 왜적이 많고 지형도 험악하여 전투를 회피하고 있었다.
11월 초에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구례읍내 20대의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었다. 이들 의병은 9월 하순에 순절한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주축이 된 왕의성군(王義成軍)과 구례현의 각 면에서 모여든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 이른바 5의사군(五義士軍)이 합세한 의병연합체였다. 이들은 각자의 집안 하인들과 산중에 피난중인 백성들을 모아 수 백 명의 의병조직을 갖추어 석주관에 진영을 마련하였다.
11월8일에 구례의병은 구례 화정에 이르러 남원의병장 조경남과 왜적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11월9일에는 연곡에서 남원의병과 함께 연합하여 왜군 60여명을 참살하고 포로 20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후 구례 의병은 화엄사로부터 의승병 義僧兵 153명과 의곡 103석을 지원 받아 군세를 보강하였다.
그런데 연곡 전투에서 패한 왜군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대규모 보복에 들어갔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구례의병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분산작전을 꾀하였다. 석주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측 산등성이에는 오의사군이, 산 정상에는 왕의성군이 포진하였다.
구례의병은 피내 血川로 불리는 계곡으로 왜군을 유인한 다음 숲속에 잠복한 오의사군이 의승군과 합세하여 좌우에서 일제히 적을 공격하였다. 또한 계곡의 북향 정상부에 진치고 있던 왕의성군은 골짜기에 숨어든 왜적을 향해 큰 돌을 굴러내려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구례의병은 일시 대승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계속 밀려오는 왜군의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하고 산정에 있던 왕의성 부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의병과 의승들의 피가 골짜기를 물들였다. 피 냄새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곳을 피아골이라고 하였다.
사당 안에서 왕득인 등 칠의사 위패를 하나하나 보면서 묵념을 드렸다. 곁에 있는 전몰 의병 그리고 의승들의 신위에도 머리 숙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후손들은 당신들의 큰 뜻을 잊지 않겠나이다.
칠의사를 나와서 동재 재명각 齎明閣을 둘러본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칠의각기와 매천 황현(1855-1910)의 칠의각상량문 현판이 있다.
최익현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왜경에게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단식하다가 순절하였다.
황현은 1910년 한일병탄에 분노하여 자결하였는데, 그는 1901년에 칠의각 상량문을 짓고 두 수의 ‘석주칠의각’ 시를 남겼다.
제1수
한번 의를 판단하여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발길 돌림이 죽음 더디어 싫었네.
일어나는 벌떼 소리 군사들의 함성인 것 같고
분노하여 싸우던 돌멩이 섞어 순절비 빚었네.
긴긴밤 모래사장에는 무지개가 뻗쳐 있고
차가운 강의 단풍나무엔 궂은 비 내리네.
걱정만 한다고 거센 파도 잠재우랴
오늘에야 공 같은 분들이 그리울 뿐이네.
제2수
밝은 달 밤 빈 골짝엔 새 벌레 소리 슬피 울고
높은 강물 굽이굽이 단을 안고 흐르네
떠도는 야사 野史를 등불 돋우며 보노라니
어렴풋이 혼령들이 꿈속에 들어오네.
물가에 쌓인 모래자갈 더미에 창칼이 묻혔고
머리 허연 후손들이 누대를 세웠네.
칠의각에 오르니 설움이 북받쳐 오고
고금의 일 쓸쓸하여 한 잔 술에 부치네.
석주관 의병항쟁이 알려진 것은 정조 22년(1798)이었다. 이 때 화엄사 승당 僧堂을 중수하면서 두 건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승병격문과 ‘정유란 일기’가 그것이다.
이후 순조 4년(1804)에 7의사들에게 공훈이 내려졌으며, 고종 5년(1868)에 칠의단(七義壇)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1901년에 칠의각이 지어졌다.
칠의사를 나와 앞을 보니 무덤들이 여러 개 있다. 구례현감 이원춘과 7의사의 묘이다.
한편 ‘정유전망의병추념비 丁酉戰忘義兵追念碑’에는 구례 의병들의 숭고한 충의정신이 배어있다. 명문 銘文을 읽었다.
나라 위한 부름에 백성과 승려를 어찌 가리겠는가.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
임금 위해 몸 바치는 일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리.
돌 조각에 옛일을 새기노니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그랬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의병과 승병을 어찌 가리겠는가.
두 차례의 구례 석주관 전투는 전라도가 왜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상황에서 군세 郡勢가 약한 구례에서 일어난 의병 항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사진 1. 칠의사
2. 칠의사 사당의 위패들
3. 재명간에 있는 편액들
4. 칠의사 묘소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이 연재는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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