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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제40회 전라도 백성들의 수난사 (1) 기씨부인 일비장과 양씨 삼강문 김세곤 무등일보

제40회 전라도 백성들의 수난사 (1) 기씨부인 일비장과 양씨 삼강문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부
입력시간 : 2014. 03.25. 00:00



왜적에 잡힌 손 은장도로 잘라내고 강물에 몸 던져

절개 지켜 죽은 부녀자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고

효자가 다음이고 충신은 또 그 다음이다

선비들이 평소 의리를 강론할 때에는

누군들 대장부라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위태로움에 처해 목숨 바치는 데에는

도리어 부인네들보다도 못하였구나

왜군은 전라도를 초토화하였다. 야만적인 살상과 납치,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백성들은 앞 다투어 산 속으로 숨고 배를 타고 피난을 갔다. 이런 와중에 가장 고초를 겪는 이는 부녀자들이었다. 왜군들은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붙잡아서 동거하였다. 어떤 여인들은 정절을 지키려고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윤국형이 지은 '문소만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임진년 난리 이후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비록 대가세족 大家世族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왜적들에게 몸이 더럽혀진 자가 많았다. 이 중에서 두드러지게 절개를 지킨 자는 조정에서 알아보고 정문 旌門을 세워 주었다.

9월19일에 장성의 기씨부인이 황룡강 푸른 물에 몸을 던졌다. 기씨부인은 고봉 기대승의 딸이자 하서 김인후의 손자 며느리였다. 남원성이 함락되고 왜적이 전라도를 점령하자 남편 김남중은 시아버지 종호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을 떠났고 그녀는 어린 두 아들과 함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면 친가로 갔다.

그런데 왜적이 광주까지 진입하자 기씨부인과 친정집 식구들은 다시 피난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사방에 깔린 왜적은 이들을 검문하였다.

왜적은 오빠 효맹과 남동생 효민을 칼로 죽이고 기씨부인을 욕보이려고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왜적의 손을 뿌리치고 지니고 있던 은장도로 자신의 팔뚝을 잘랐다. 왜적에게 잡힌 손을 그냥 달고 있는 것조차 정조를 더럽힌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왜적을 크게 꾸짖고 황룡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나이 29세였다. 같이 있던 두 올케도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황룡강 물에 몸을 던졌다.

기씨부인과 같이 있던 어린 두 아들은 일본에 끌려간 듯하다. 일제시절에 ‘하서(河西 가와니시)’ 성을 가진 고부 경찰서장이 장성을 찾아왔다 한다. 그는 자기의 조상이 조선 사람이라면서 일본에 ‘하서’ 성을 가진 집안이 더러 있다는 말을 했단다.

광주 월봉서원 가는 길에 칠송정 七松亭이 있다. 이곳은 의곡장 기효증이 선친 고봉 기대승의 시묘살이를 하던 곳이다. 일설에는 칠송정은 기대승과 기효증 그리고 효민과 효맹 부부와 기씨부인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난리가 끝나자 기씨부인 남편 김남중은 강원도에서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종으로부터 기씨부인의 팔뚝 하나를 전달받았다. 부인과 두 어린 아들을 잃은 그는 슬피 울면서 이 팔뚝을 선산의 하서 선생 묘 바로 밑에 장사지냈다. 이 묘가 바로 일비장 一臂葬이다. 기씨부인은 효종 때 정려 旌閭가 내려졌고 마을 입구에는 열부문 烈婦門이 세워졌다.

최근에 기씨부인 이야기는 장편 서사시로, 음악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류시인 김혜정의 시집 ‘기씨부인전’이 출간되었고, 장성군이 자체 제작한 음악극도 공연되었다. 음악극 ‘기씨부인전’은 2013년 11월에 장성 문예회관에서 4회 공연하였는데 크게 갈채를 받아 3월21일에 앙코르 공연을 하였다.

한편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는 ‘양씨삼강문’이 있다. 여기에는 1593년에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양산숙의 충(忠)과 양산룡과 양산축의 효(孝)·양산숙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누이의 열(烈)을 기리고 있다. 이 정려는 1635년(인조 13년)에 세워졌다.

왜군이 전라도를 쳐들어오자 나주 박호동에 살던 양산룡과 양산축 형제도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나섰다. 양산룡의 아버지는 송천 양응정이고 할아버지는 학포 양팽손으로 지조 있는 사대부 집안이었다.

이들은 9월17일에 배를 타고 서해바다로 나가려고 삼향포(무안군 몽탄)에 도착하였다. 배가 막 떠나려는 즈음에 수척의 왜선이 갑자기 들이닥쳐 포성이 하늘을 진동하였다. 9월16일 명량해전에서 패한 일본수군은 조선함대를 찾으려고 무안, 함평, 영광 앞바다를 뒤지고 다닌 것이다.

화를 면할 수 없게 되자 양산룡의 어머니 박씨는 형제들에게 “나는 대부 大夫의 아내이다. 왜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온 가족들이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건지자 그녀는 오히려 화를 내며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데 건지면 무엇하냐?”하고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양산룡과 양산축이 다시 어머니를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죽고 말았다. 양산룡의 아내 류씨, 누이동생도 따라 죽었다.

이어서 양산숙의 아내 이씨와 양산축의 아내 고씨도 함께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하인들이 건져냈다. 두 여인은 포구 앞 승달산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왜적들이 몰려오자 이씨 부인은 스스로 목에 칼을 꽂았다. 이씨의 자결을 목격한 적들은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양산축의 아내 고씨만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제봉 고경명의 손녀인 고씨는 왜군이 물러가자 하인 2명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였다.

전쟁의 수난은 기씨부인이나 양씨 일가 뿐이 아니었다. 팔도의병장 김덕령의 부인 이씨도 왜적을 피하여 담양 추월산 보리암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여 오는 왜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낭떠러지에 몸을 던졌다. 나중에 정조 임금은 김덕령이 태어난 마을을 충효리로 이름 지어 주고 충효비를 마을 앞에 세워주었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주인공인 서하당 김성원도 노모를 모시고 화순 동복의 성모산 聖母山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나타나 노모를 살해하려하자 몸으로 가리어 함께 죽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산을 모호산 母護山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성산별곡’ 앞부분을 읊어본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낮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10월8일에 선조는 자신을 허물하는 교서를 전라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에게 내렸다. 이 교서를 읽으면 전라도의 참상을 실감할 수 있다.

호남과 호서는 참으로 세족 世族이 사는 부고 府庫로서 백성의 번성함도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었는데 병화가 일어난 후로 칼날과 기근과 역질에 죽은 자가 십에 팔구가 되니, 외롭게 남은 민생이 피폐가 심하여 마음 아파함이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지금 왜적의 독기 부림이 전보다 더 심하여 칼날이 미치는 곳에는 어린 아이도 남기지 않아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루니 서울아래 천리 지역이 모두 살육하는 장소가 되었다.

한편 광해군은 1617년(광해군 9년)에 임진왜란 때의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삼강행실도의 속편인 이 책에는 총 1천725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시 충신 54명, 효자 94명, 열녀 436명 총 584명이 수록돼 있다. 열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에 대하여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부녀자 중에 절개를 지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었고,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은 또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드러나게 칭찬할만한 자가 또한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아! 선비들이 평소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할 때에는 누군들 내가 대장부라고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위태로움에 처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에는 도리어 부인네들보다도 못하였구나.

이 연재는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기씨부인 묘 - 일비장

2. 기씨부인 정려비각

3. 양씨 삼강문

4. 양씨 삼강문의 충· 효·열 편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