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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퇴계, 고봉에게 충고하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책 6월초에 발간 합니다.

퇴계, 고봉에게 충고하다.

- 삼가 어려운 시절에 몸을 더욱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주시길.

퇴계, 고봉에게 충고하다.

 

15693월에 퇴계가 안동으로 내려 갈 때 퇴계는 선조에게 학문하는 자로 고봉을 추천하였다. 다만 수렴 공부는 부족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퇴계는 1569년 말에 고봉이 거친 성질을 부리고 술을 엄청 마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당시 고봉은 영의정 이준경의 핍박을 받고 있었고 소당과 노당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5701월 그믐, 퇴계는 고봉에게 따끔한 충고 편지를 보낸다. 퇴계는 이미 선조에게 고봉을 통유 通儒로 추천까지 하였는데, 고봉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매몰찬 충고를 한다.

 

영전에 절하고 답하여 아뢰는 편지, 기 대사성 댁

(전략)

 

그대가 시골로 내려갈 뜻을 이미 굳히셨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는데, 지금 편지에 운운하신 말씀을 보니, 비로소 소매를 펄럭이며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략)

 

세상에 드러나고 못하고는 운명에 달린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저렇게 하는 것 또한 운명입니다.

 

여기에서 저들이란 영의정 이준경 등의 노당을 말하는 듯하다. 이 당시 기대승, 이이, 심의겸이 주도하는 신진 사림세력은 이황을 종주 宗主로 삼고, 떼 지어 서로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면서 그들 스스로 한 무리가 되어 소당이 되었다. 기대승을 대표로 하는 소당은 156969일 대사헌 김개의 발언이후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권철 등의 정권 주도세력인 노당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우리에게 저렇게 하는 것이란 영의정 이준경이 이황을 일컬어 산새라고 발언하고 기대승에게 공개적으로 핍박 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봉은 1570116일자 퇴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준경이 핍박한 사실을 적고 있다.

선생께 올리는 편지, 판부사 댁

삼가 여쭙니다.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중략) 다만 새해가 되기 전부터 감기로 인하여 사직하고 한가로이 지내다 보니, 원망과 걱정을 불러일으킨 것이 일일이 들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달 초순을 넘기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략)

 

경오년(1570, 선조3) 116일 후학 대승은 절하며 올립니다.

 

영의정이 얼마 전 경연 자리에서 선비들 습속의 폐단을 아뢰기를, 선비들이 자신의 수양은 게을리 하면서 정치적인 이들만 논의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습니다. 이어 성균관의 관원들이 학생들을 천대하여 식사 준비를 소홀히 한 잘못을 범했다면서, “계집종을 유생(儒生)들에게 내보내고 몸소 식당(食堂)을 점검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승정원에서 임금께 아뢰고 지관사(知館事: 지성균관사 , 2) 이하를 불러 말하였는데, 저는 그때 마침 병으로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소집 대상에 끼지 않았고, 그 뒤에 바로 체직되었습니다.

(이때 기대승은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 필자 주)

 

바깥에서 논의하기로는 다들 그렇게 한 것 뜻이 저를 배척하는 데 있다고들 합니다. 제가 식당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계집종을 내보낸 일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드러나는가 못하는가는 천명에 달린 것이니, 그가 천명에 대해서 어찌하겠습니까. 가소로울 뿐입니다.

 

이어서 퇴계의 편지를 읽어 보자

 

다만, 이런 일에 부딪치게 되면 또한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보고 사리를 좇아 하나하나 뼈아픈 반성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일러 세상을 업신여기고 상대에게 오만하고 사람들을 능멸하며 말을 삼가는 데 부족하고 몸을 단속하는 데 소홀하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힘써 고쳐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해도 다시 한 번 분발하는 것이 옳습니다.

 

 

퇴계는 이런 때 일수록 더욱 뼈아픈 반성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고봉의 거친 성정을 고치라고 타이르고 있다. 거친 성정! 이에 관하여는 156088일자 편지에서 고봉 스스로 고백을 하고 있다.

 

대체로 저는 바탕은 비록 허약하지만 기세는 강하고 거칩니다. 실행은 비록 완성되지 못했지만 이름은 먼저 퍼졌습니다. 무릇 허약한 바탕에 충실한 실행이 없다면 자신을 보존함에 반드시 허술한 구석이 있을 것이며, 강하고 거친 기질로 허명(虛名)만 붙들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응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미진한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품성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며, 행동이 경솔 방자하여 입바른 소리를 해대니 혜숙야(嵇叔夜) 같은 사람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고 어찌 세상에서 쓰일 만하다고 하겠습니까?

 

헤숙야는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중국 진나라의 혜강을 말한다. 노장사상에 심취한 혜강은 도량이 넓고 감정이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고봉은 감히 혜숙야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거칠고 가벼이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모습에는 감히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봉의 거친 성정에 대하여는 <연려실기술>과 미암 유희춘의 일기에도 나와 있다.

 

고봉은 기개가 호준(豪俊)하고 언론이 좌중을 압도하였다. 또 남한테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자기를 따르는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정직한 선비와는 맞지 않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이 따라 붙었다. - <연려실기술>

 

다만 굳세고 과단성을 스스로 써서 그 언어를 경솔하게 하며, 조정의 원로들을 비방하여 옛 신하와 벼슬아치들이 크게 미워하게 되었으니, 대개 날카로운 기운을 없애지 못하다가 갑자기 병들어 통곡하는 병폐가 있었다고 한다. - <미암집>의 일기에서. (조선유학사, p154-155에서 인용)

 

 

퇴계의 질책은 더 이어진다.

 

또 듣건대 요즈음 다시 술을 굳게 다스리지 못하여 오래지 않아 큰 병이 나겠다고 하니, 그대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런 평판을 얻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퇴계는 고봉의 술 마시는 버릇을 나무란다. 이 나무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퇴계는 1567318일자 편지에서도 고봉에게 술을 너무 마시는 병폐를 줄이라고 조언한다. 술을 다스리지 못하면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는 충고이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공이 근래 자못 술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 하니,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과연 그런 병통이 있다면 덕으로 나아가고 삶을 보위하는 방도가 아닌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봉은 1567511일자 답서에서 슬 좋아하는 병통은 소싯적부터 있었는데 떨쳐 버리지 못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다시 병통이 도진 젓이다.

퇴계의 편지는 계속된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제 고향으로 가시거든 온갖 잡념을 떨쳐 버리십시오. 문을 닫고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나서 학업을 익히고 다스리십시오. 깊이 생각하고 언행을 단속하십시오. 무릇 성현의 지극한 훈계인 충신(忠信 : 말은 충실하고 믿음 있게)독경(篤敬 :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스럽게)참전의형(參前倚衡 : 서있을 때 바로 앞에 같이 있는 듯, 수레를 탈 때는 책 끝 횡목에 기대고 있는 듯 그런 행실을 몸에서 떼지 말아야 한다.)등을 모두 빈말로 보지 말고 반드시 내 몸에서 그러한 행실이 친히 보이게 하여 실제로 그것을 체화하기를 기약하십시오. 그리하여 자신에게 돌아올 중책(重責)을 저버리지 마시길 간절히 빕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잘못 천거(薦擧)하였다고 다투어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잘못 천거하였다고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대에게 기대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 같이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대가 평생 뛰어난 재주를 마구 써버리고 방탕한 습관에 얽매여, 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방자하게 노는 데 빠져서, 마침내 성현의 세계와 수만 리나 멀어지게 된다면, 이는 그대를 공격하는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사람을 알아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비록 잘못 천거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하여도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천거란 퇴계가 1569.3.4 선조에게 고봉을 통유로 천거한 것을 말한다. 퇴계는 기대승이 문자(文字)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가장 높으니 통유(通儒)입니다. 다만 그는 수렴 공부(收斂: 내성 內省 한다는 뜻)가 부족한 것이 미진한 점인데 소신이 평상시에 이 점을 부족하게 여겨서 좀 더 공부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자 儒者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라고 선조에게 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퇴계는 고봉이 더욱 근신하기를 당부한다. 지금 고봉에게 닥친 어려움을 반성의 계기로 삼아 심기일전하기를 거듭 당부한다.

공자께서 중궁(仲弓)에게 공경()과 용서()의 보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고 집 안에 있어도 원망이 없다.”라고 하셨고, 주자(朱子)는 왕단명(汪端明)이 휴가 얻은 것을 기뻐하면서, 더욱 학문을 강론하고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도 깊이 생각하고 힘써 자신을 돌이킨다면 더 할 나위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끝으로 부디 자신의 몸을 지키고 아껴 진중(珍重)하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삼가 절하며 감사드립니다.

 

융경(隆慶) 41570년 정월 그믐, 황은 머리 숙입니다.

 

 

이러한 퇴계의 따끔한 충고에 대하여 고봉은 1570.4.17.자 편지에서 퇴계에게 변명을 하고 술을 끊었다고 말한다.

 

 

선생께 답하여 올리는 편지, 판부사 댁

(전략)

 

앞뒤로 깨우쳐 주신 말씀은 저의 병통에 맞는 약이 아닌 것이 없으니, 제가 어찌 감히 깊이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참으로 병을 없애고 효과를 얻는데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반드시 우러러 말씀드려야 할 회포가 있는데, 스스로 변명하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 또한 깊습니다.

 

그러나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한두 가지 말씀 드리니, 바라건대 너그러이 살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상대에게 오만하고 사람들을 능멸한다는 데 대해서 저는 이런 마음이 없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상론(商論)하는 사이에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을 자초하였으니 진실로 통렬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편벽된 성품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삼가는 데 부족하고 몸을 검칙하는 데 소홀한 병통에 대해서는 제가 본래 알고 있는 바여서 항상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나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근본이 심후(深厚)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마다 번번이 드러나서 그렇게 되는 듯한데, 만약 근본에 공력을 더 쏟는다면 거의 조금은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술에 대한 일은 근래 병이 많으므로 인하여 끊었더니 몸을 기르고 덕을 기르는 데 모두 유익함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강력히 억제하여 다시 술에 빠지지 않고자 합니다마는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 천거하였다는 말은 저도 당초에 그렇게 생각하였으니 남들의 비난과 비웃음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는 다만 분수에 따라 힘을 써서 만분의 일이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할 뿐입니다.

 

 

고봉, 자기의 처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다

 

15701115일 고봉은 퇴계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고봉은 자신의 처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한다.

선생님께 올리는 글

(중략)

저의 지난날의 처신이 일반적인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군신의 의리는 천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비록 용납되지 않아 떠났다 하더라도 무심할 수만은 옳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세상이 꺼리는 것을 무릅쓰고 절실한 걱정을 대략 아뢰었던 것입니다. 화복이 오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므로 미리 그 후환을 걱정해서 지나치게 나약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요즈음의 사대부들은 너무 화를 두려워하여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자못 한쪽으로 쏠려 있으니, 장차 이런한 풍조가 남긴 폐단을 구제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저는 비록 못났지만 마음속으로 이를 항상 걱정하였습니다. 때문에 벼슬에 나온 이후로 감히 구차히 몸을 보전할 생각을 접은 지가 오래인데, 오늘에 와서 어찌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중략)

 

비록 그렇지만, 선생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거친 성정을 바로잡아 중도(中道)에 부합하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고 배움이 보잘 것 없어 저를 알아주신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 할까 걱정되어, 두려운 생각에 밤낮으로 편히 지내기 어렵습니다.

 

물격(物格), 무극(無極) 등에 대한 해석은 선생님께서 굽어 살펴 주시어 평소 분분하게 오갔던 것이 끝내 한가지로 매듭지어졌습니다. 한 평생에 이보다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흥에 겨워 어깨춤이 추어도 그 즐거움을 다 드러내지 못 할 것입니다.

 

호남과 영남이 산천이 막히고 길이 멀어 배알(拜謁)할 길이 없으니, 몸소 경계의 말씀을 받들고 의심스럽거나 분명치 못한 것을 여쭈어 볼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종이를 펴 놓고 편지를 쓰려 하니 슬픈 생각이 일어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세모(歲暮)가 가까워 추운 날씨가 더욱 사나워지는 이때에 몸을 더욱 돌보시길 천만 번 비오며 이만 줄입니다. 아울러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경오년(1570) 1115일 후학 대승은 절하며 올립니다.

 

고봉은 퇴계에게 더욱 자기를 다스려 자기를 알아주는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128일에 퇴계가 별세하여 , 고봉의 이 편지가 퇴계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고 만다. 너무 안타깝다.

 

한편 고봉이 사람을 보내어 부친 편지를 받은 퇴계는 건강이 악화되어 편지를 스스로 쓸 수 없어 아들에게 대필을 시킨다. 퇴계는 인편을 잡아두고 급히 마지막 편지를 쓴다.

 

절하고 답하여 올리는 편지, 기 승지 댁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멀리 사람을 보내어 부치신 귀한 편지와 별지를 함께 받고서, 한가로이 수양(修養)하면서 도를 음미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심을 구체적으로 알고는 염려되던 마음이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대는 이 한 번의 일로 한가하고 고요하게 학문에 전념하려는 오랜 소원을 이루었건만, 나는 본래 강직하고 자기 길로 나서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의 노여움을 샀는데, 지금 이미 늙어서도 오히려 세상에 얽매여 있습니다. (중략)

 

근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대략 적었습니다. 삼가 어려운 시절에 몸을 더욱 아끼고 보호하여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

 

경오년(1570) 1117,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퇴계는 고봉이 부디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여 정진하기를 부탁한다. 고봉은 비록 퇴계에게 직접 공부를 배운 안동의 문하생은 아니었지만 가장 치열하게 성리학에 정진한 학도였다. 퇴계가 보기에 정통 주자학을 이끌 통유였다. 고봉이 조선의 통치철학으로서 성리학을 정립하여 주기를 바랐다. 그의 수법제자로서 조선을 이끌기를 바랐다. 또한 퇴계는 고봉을 너무 아끼었다.

 

그리하여 고봉의 영원한 멘토인 퇴계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이 나라를 이끌 고봉에게 몸을 다스리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말라는 당부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