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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귤정 윤구 묘소 - 윤선도 증조부

 

 귤정  윤구 . 그는 기묘사림으로  해남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유성춘, 최산두와 함께 호남 3걸로 문장이 뛰어 났다. 해남군 북일면  갈두리에 그의 묘소와 재각이  있다.

 

 

귤정 윤구와   눌재 박상의 교우 

 

 

1519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난 때 눌재 박상(1474-1530)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광주에서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화를 면하였지만 기묘명현들이 고난의 길을 가고 있음에 동병상련하였다. 그는 유배중인 윤구, 신잠, 그리고 낙향한 고운에게 위로의 시를 주고받는다.




어떤 나그네가  금강 錦水의 구석에서 가을을 서러워하네.

근심이 막막하더니 가슴 열리는 듯하다.

시비가 뒤섞여 황금을 녹여내고

벗들은 사라져 백골에 이끼 낀다.

외로운 울분 다만 시에 담아 노래하고

괴로운 마음 때때로 술로써 푼다.

서녘 바람에 평생의 뜻 무한하여

도연명의 귀거래사나 소리 내어 읊으리.


 

   이 시는 박상이 해남에서 유배중인 윤구(1495-1549)에게 화답한 시이다.  시에 금강이 언급된 것을 보니 1521년 충주목사 시절에 쓴 시 같다. 사화로 사림들이 모두 화를 당한 시절. 어떤 벗은 사약을 받고 어떤 벗은 유배지에서 자살을 하고, 어떤 벗은 고문을 당한 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 삶을 사는 시대, 눌재는  그 울분을 시에 담고 술로 괴로움을 달랜다. 이런 눌재의 살아가는 방식을 시에 담아 친구에게 보내고 있다.


   


     귤정 윤구는 1516년 문과에 급제 승정원에서 주서 注書(정7품)로서 일하다가 1520년에  훈구파들에게 핍박을 당하여 해남으로 유배를 온다. 


   그가 귀양을 오게 된 사연을 살펴보자.  좌의정 김응기가 면직되기를 청해서 임금의 윤허를 얻었다. 공이 주서로서 왕명을 받들고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신용개의 집에 가서 정승 될 만한 사람을 고르고(복상이라 한다) 승정원에 돌아왔다. 승지 박세희가 맞이하여 묻기를, “오늘 복상된 사람은 안당安塘 어른이겠지.” 하였다. 공이 공손하게 대답한 뒤에 복명復命하기를, “영의정 정광필은, ‘마음가짐과 일처리 하는 것은 오직 안당이 첫째다.’ 하였고, 우의정 신용개는, ‘만약 직책의 차례를 말한다면 김전(金銓)ㆍ이계맹(李繼孟)이 있지만 안당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여, 드디어 안당을 정승으로 삼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뒤에 당시 재상들이 ‘이전에 복상할 때에 우의정 신용개가 이계맹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박세희의 말을 듣고 다르게 복명하였다.’ 하여 추문하고, 박세희까지 죄주고자 하였으나 공을 죄주는 것만으로 그쳤다.


    그는 해남 삼산면 녹산역(綠山驛)에 18년간 유배살이를 하였다. 그 후  1538년에 복직되어 전라도사(全羅都事)를 거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에 올랐다.



 윤구는 최산두 ․ 유성춘과 함께 호남3걸로 이름이 났으며 퇴계 이황과 같이 호당에 뽑혀 사가 독서하였다. 그는 일찍이 초나라 왕 의제(義帝)를 위해 발상(發喪)하는 논문(論文)을 지었는데 온 세상에 전해졌다. 뒤에 참판 송재 나세찬(1498-1551)이 중국 북경에 가서 《향시록(鄕試錄)》을 보니 귤정이 지은 논문이 그 중에 실려 있었다.


(나세찬은 1547년에 성절사로 연경에 다녀오다. 이때 윤구의 글을 본 것 같다.)

   고관(考官)이 비평하기를, “어느 곳이라도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리오 마는 양광(兩廣 중국의 광동성과 광서성)이 아니면 서북 지방의 과시(科試)였을 것이다.” 하였는바, 이 논문이 어느 경로를 좇아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는 해남윤씨 종조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이다. 윤효정은 금남 최부에게 공부를 배운 사람이고 최부와는 동서간이다. 원래 윤효정은 강진군 도암면에 살았는데  해남의 대부호인 호장 정귀영의 사위가 되어 재산을 물려받았다. 해남군 북일면 갈두리에 그의  묘소가 있다. 해남군 해남읍 해리의  해촌서원에는 그와 그의 증손자 고산 윤선도의 신위가 함께 모시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