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풍류객, 임제 백호
얼마 전에 광주에서 목포로 내려가다가 나주를 지나 10여분 가니 창계서원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백호 임제 선생 묘소’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이 표지판을 목포에서 광주를 다니면서 한 두 번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인상 깊었던 것은 며칠 전에 읽었던 황진이 소설책 때문이었다.
백호 임제 (1549 명종4년 -1587 선조 20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객. 35세 때 평안도사(종6품)로 부임하러가는 길에 송도(지금의 개성)의 황진이 묘에 들러 관복을 입은 채로 술잔을 올리고 제를 지내며 추도시를 읊었다하여 조정으로부터 파직을 당한 로맨티스트.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가 누워 있는가.
홍안을 어디에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시조를 양반 신분에 기생의 무덤 앞에서 예를 갖추고 읊었으니 그 자유분방함이 가히 풍류객답다.
며칠 후에 나주시 다시면 신걸산 정상에 있다는 백호 임제의 묘를 간다. 백호의 묘로 가는 길 입구에는 “백호 임선생 묘소 입로”라고 표시된 비석이 있고, 산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그런데 그 계단을 한숨에 오르기는 너무 벅차서 두세 번 쉰 후에 신걸산 정상에 올랐다. 산 정상에 오르니 비석이 두개 있는 묘가 있다. 이 묘가 바로 백호의 묘이다. 묘에서 앞을 바라보니 툭 트여 있는 풍광이 가히 일품이다. 좌우로 두개의 산이 감싸 안고 있고 또 멀리에 산 하나가 가로막고 있으며 나주 평야와 국도변이 바로 보인다.
나는 맨 먼저 묘의 반석 앞에서 백호 임제 선생에게 묵념을 드렸다.
“벡호 임제 선생님. 소생 아무개입니다. 며칠 전에 여류소설가 전경린 씨가 쓴 ‘황진이’ 소설책을 읽고서 황진이가 대단한 기생이었음을 다시 한 번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신분제도가 너무 뚜렷한 조선시대에 기생 황진이에게 인간미 넘치는 풍류를 보이셨으니 선생은 더 대단하시옵니다. 이런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 남도 땅 나주에 잠들고 계시니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황진이를 생각하였다. 백호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황진이를.
황진이(黃眞伊),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기록에 의하면 그녀가 15세 때 이웃에 사는 어느 서생이 그녀를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었는데 상여가 황진이집 앞에서 멈추어 버렸단다. 그녀는 속치마를 벗어 그 관을 덮어주니 상여가 움직였고 그 후 그녀는 기생이 되었다한다. 이렇듯 황진이는 데뷔부터가 장안의 화제였다. 그리고 시와 노래와 거문고와 춤에 능하였으니 몸값이 높을 수밖에.
황진이에 대한 일화는 너무 많다. 우리나라 최초로 계약 결혼을 한 것도 그녀이다. 양반 이사종과 3년 살기로 계약 결혼을 한 후에 다시 3년을 더 살았다. 특히 종실 벽계수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벽계수는 황진이를 만나고 싶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를 않아 친구에게 의논을 하였다. 벽계수의 친구는 벽계수에게 ‘황진이 집근처의 누각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조 타면 황진이가 올 것이다. 그러면 본 체 만 체 하고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니 다리를 지날 때 까지 돌아보지 말라’ 고 일렀다. 그래서 벽계수는 친구가 시킨 대로 거문고를 한 곡조 타고 말을 탄 채로 다리를 향하였다. 이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말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 시조를 듣고 벽계수가 뒤를 돌아보다가 타고 가는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황진이는 웃으며 ‘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이네 ’ 하고 돌아서 버렸다 한다.
황진이와 유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사랑도 유명하다. 황진이는 서화담을 꼬여 보려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잤으나 동침에 성공하지 못하고 화담의 제자가 되고 만다. 서화담을 마냥 존경하고 사모한 황진이는 서화담이 죽자 이런 시를 읊는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가 조선시대의 명기(名妓)중에 명기라면, 백호는 조선시대의 한량 중에 한량이다. 아니 풍류객 중에 풍류객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세상을 사는 것이 바람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풍류야말로 우리 고유의 멋 아닌가.
조선 선조시절 사색당파 싸움 속에서 무리지어 논쟁이나 하는 모습이 싫어 자연을 벗 삼고, 풍류를 즐긴 백호. 그래서 그는 날고 긴다는 명기란 명기들과 인간미 있는 시와 음악으로 교류하였기에 그의 인생살이는 기생들과의 일화가 많다. 그런 일화 중에 유명한 것이 한우(寒雨)와의 사랑이다.
한우(寒雨)는 평야의 명기. 가야금을 잘 타고 시에 능한 콧대 높은 기생이었다. 그런 한우를 백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꼬신다.
“북창이 맑다고 하기에 우장(雨裝)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
한우 기생은 백호에게 이렇게 화답을 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일 얼어 자리
원암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한우의 순수한 우리말은 ‘찬비’이다. '찬비'는 기생 '한우(寒雨)'를 은유한 것이고, '맞았으니'는 '비를 맞다' 는 뜻도 되지만 '맞이한다(迎)'의 은유이다. '오늘은 그리던 한우 너를 맞았으니'의 뜻이다. ‘얼어 잘까 하노라’는 ‘얼어 잘 수밖에 더 있겠는가.’ 라는 직역도 가능하지만, '임 없이 혼자 웅크리고 잔다는 쓸쓸함' 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한우의 화답 또한 뛰어나다. '무엇 때문에 찬 이불 속에서 혼자서 주무시렵니까. 저와 같이 가슴 맞대고 따뜻하게 주무시지요 ' 한다.
일설에 의하면 하룻밤을 같이 잔 한우는 백호에게 푹 빠져서 같이 살자고 했단다. 그런데 백호는 이를 뿌리쳤다 한다. 한량끼가 너무 많아서 그랬을까.
아니 내가 왜 이렇게 백호의 묘 앞에서 기생 이야기, 한량 이야기만 하는 것일까. 백호하면 황진이가 곧바로 연상이 되어서 일까. 아니면 뭇 남자들은 누구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백호의 한량끼를 부러워해서 일까.
한편 백호의 묘에는 두개의 비석이 나란히 있다. 하나는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 백호임공지묘, 숙인 경주김씨*(한 글자는 알 수 없음)” 라고 써지고 비석의 뒷면에는 아예 아무 글씨도 안 써진 비. 또 하나는 그의 외손자 미수 허목(1595 선조 28년-1682 숙종8년)이 비명을 쓴 비석. 허목은 우암 송시열과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예송논쟁을 하여 1승1패를 기록한 남인의 우두머리이다. 허목이 쓴 비문은 1989년에 임씨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 세워져 있다. 한문과 한글로 새겨진 이 비문 중에 ‘ 공은 자유분방하여 무리에서 초탈한데다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으로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 “ 라는 글이 인상 깊다.
이제 백호 임제의 묘를 내려온다. 중간쯤 내려오니 계단 왼편으로 시누대가 심어져 있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시누대. 다시 진입로 밑으로 내려와서 진입로에 세워져 있는 두개의 비를 찬찬히 본다. 하나는 묘소진입로개설을 기념하는 “백호 임선생 묘소 입로” 비. 이 비에는 “천재시인이며 자주독립의 사상가인...”이라고 시작하는 백호 임제에 대한 약력이 적혀 있다.
또 하나는 “백호임제선생詩碑”이다. 그 詩碑 밑에는
“ 칼 튕기며 행수대에 오르니 기운이 솟는다. 초라한 벼슬자리 내 모습 쓸쓸하여라 찬 가을바다 교룡이 꿈틀대고 구름 깊은 장백산엔 호랑이 득실대네 세상에 태어나 만주 땅을 못 삼키고 어느때 다시 서울로 돌아갈건가 잔 비우고 말 타고 돌아서니 아슬한 저 하늘엔 안개 걷히네. “
이 시가 바로 백호가 32살에 함경도사로 근무할 때 평안도 정주땅 원수대에 올라가서 지은 한시이다. 호방함과 남아의 기개가 서리고, 자주 독립에 대한 기상도 넘친다.
목포로 오는 차안에서 백호 임제를 다시 생각한다. 그는 천재시인 인가 독립사상가 인가, 아니면 방랑과 자유분방이 너무 넘친 풍류랑인가. 내가 보기에 백호는 ‘ 사회의 규범 틀을 깬 기인(奇人)이다. 그리고 신분제도와 패거리 정치에 신물을 느껴 휴머니즘에 더욱 다가간 가장 한국적인 풍류를 아는 외로운 천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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