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난산 , 卵山
백화정에서 난산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이다. 난산은 맥동마을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이다. 모양이 계란처럼 생겼다 하여 난산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난산은 하서가 매년 인종의 기일에 인종을 생각하며 통곡하던 곳이다.
1543년 7월 1일 인종이 승하하였다. 하서는 인종이 세자일 때 인종을 가르치던 스승이었다. 세자 시절 인종은 하서를 극진히 사랑하여 묵죽도를 그려주고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시었다. 인종이 그린 묵죽도는 지금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는 묵죽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이리 정미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정갈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성스런 혼이 조화를 기다리심을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한편 하서의 제자 송강 정철은 <하서를 그리며>란 시를 썼는데, 이 시에는 하서가 인종을 못 잊어 하고, 해 마다 인종의 기일에 고향의 난산에 들어가 통곡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하서가 인종을 그리는 다음 시는 정말 가슴이 뭉클하다.
임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고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 되는데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한 번의 이별은 활줄 떠난 활 같네.
내 마음 돌이라서 굴러갈 수도 없는데.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같아.
한창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마저 희었네.
묻혀 살면서 봄가을이 몇 번이던가.
오늘까지 아직도 죽지 못했소.
잣나무 배는 황하 중류에 있고
남산엔 고사리가 돋아나는 데
도리어 부러워라, 주나라 왕비가
생이별 하며 도꼬마리를 노래하다니
난산 입구에는 난산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통곡대 바위도 있다. 이곳에서 보니 맥동마을이 다 보인다. 맥동마을로 다시 돌아오면서 새로 생긴 다리를 보니 다리 이름이 난산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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