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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1회 무오사화,사초(史草)로 인한 사화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1회 무오사화,사초(史草)로 인한 사화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고, 올바른 기록이 없으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는 4대 사화가 일어났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 1519(중종 14) 기묘사화, 1545(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그것이다. 사화(士禍)선비()가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이 쓴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에 사초로 인한 화’, 戊午史禍(무오사화)라고도 불린다.

 

먼저 무오사화의 개념부터 알아보자. 이기백 교수(19242004)한국사신론에서 이렇게 적었다.

 

첫 사화는 연산군 4(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史禍)였다. 이를 특히 사화(史禍)라고 적는 것은 그것이 사관(史官)들이 적어 둔 초벌 원고인 사초(史草)에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사관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다. 김종직이 단종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의제에 비기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 조의제문이었다.

연산군 초에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한 실록청을 구성하여 사국(史局)을 열었을 때 위의 사초가 발견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을 충동하여 김일손 등의 사림 학자를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 보냈다. 이로 인하여 사림들의 세력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이기백, 한국사신론. p 227-228)

 

다음은 민음사가 발간한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책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서 시작해 김종직 문인을 붕당으로 규정하고 일부 대간들을 능상의 명목으로 단죄한 사건이다.” (p 48)

세 번째는 김돈이 지은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4, 조선 전기이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1498)에 이극돈 · 유자광등이 성종실록편찬을 위해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로 제출한 것을 구실로 발생했다.” (p 156-157)

 

이 책들을 살펴보면 무오사화의 키워드는 연산군, 성종실록 편찬, 사초, 김일손, 김종직의 조의제문, 이극돈, 유자광 등이다.

 

한편 무오사화는 1498(연산군 4) 71일부터 727일까지 전개되었다.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712일부터 따지면 15일 만에 종결되었는데, 사화의 시작도 비밀스럽고 돌발적이었다.

 

그러면 1498(연산군 4) 71일의 연산군일기를 읽어보자.

 

파평부원군 윤필상, 선성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 무령군 유자광이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서 비사(秘事)를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으로 출납을 관장하게 하니 사관(史官)도 참예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검열 이사공이 참예하기를 청하니, 신수근은 말하기를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윽고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도사 신극성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외부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

 

71일에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유자광은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이 거처하는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앞문인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서 비사(秘事)를 아뢰기를 청했다. 창덕궁은 1405년에 태종이 건립한 궁권이고, 희정당은 임금의 거처 공간이었다.

 

사진 12 창덕궁 희정당

 

 

아뢰기를 청한 윤필상(14271504)1478년에 우의정, 1484년에 영의정을 한 재상으로 연산군 때는 기로소에 들어갔는데 임금의 뜻에만 영합했으므로 사림(士林)들로부터 간귀(奸鬼)로 지목받았다.

 

노사신(14271498)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 영의정에 올랐는데 임금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하여 대간들의 집요한 탄핵을 받아 1495(연산군 1) 9월에 물러났다.

 

한치형(14341502)은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한씨(14371504)의 사촌 오빠로 궁액(宮掖 대궐안에 있는 하인)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유자광(14391512)은 부윤(府尹) 유규의 서자인데 건달로 소일하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소를 올려 세조의 눈에 들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예종 초년에 남이(南怡)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이 1품의 관계(官階)를 얻게 되었다.

 

한편 야사(野史)에는 유자광이 남이의 시를 고쳐서 모반의 증거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유자광은 위 시 3구의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못 얻으면)으로 고쳐 남이를 고변했다.

이처럼 유자광은 정치 공작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1478(성종 9)에 유자광은 임사홍과 함께 도승지 현석규를 탄핵했다가 유배된 이후 성종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고 지냈다.

 

사진 3 연산군 묘 입구 (서울시 방학동)

 

사진 4 연산군 묘 표시판

 

사진 5 연산군 묘

 

한편 출납을 관장한 도승지 신수근(14501504)은 연산군의 큰 처남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장인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즉위한 후 1495년에 좌부승지, 1496년 우승지, 1497년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처형되었다.

 

신수근(3)은 사관인 검열(9) 이사공의 참예를 막았다. 연산군 시대는 성종 시대와 판이했다. 성종 시대에는 사관은 거리낌 없이 국왕·대신의 모든 언동·정사·인물평 및 비밀스런 회동 등에 참예하여 그 일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 시대는 도승지가 사관의 출입을 막았고, 역사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기야 조선 시대 초부터 사관은 편전 출입이 쉽지 않았다. 이럼에도 사관들은 직필을 위해 기개를 폈다. 대표적인 인물이 태종 때의 사관(史官) 민인생이다.

 

1401(태종1) 429일의 태종실록을 살펴보자.

 

편전(便殿)에서 정사(政事)를 보았다. 사관 민인생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도승지 박석명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어제 홍여강이 섬돌 아래까지 들어왔었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無逸殿)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들어와야 하지마는,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그러나 민인생은 일찍이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끝까지 우겨 마침내 뜰로 들어왔다. 그러자 임금이 그를 보고 어찌하여 사관이 들어왔는가?’ 하니, 민인생이 대답하기를, ‘전일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태종은 목소리를 높여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민인생은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민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

 

이 얼마나 대단한 기개(氣槪)인가? 붓을 쥔 사관이 임금에게 그것도 태종 이방원에게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다고 하면서 사필(史筆)하려 했으니.

 

이후에도 사관 민인생은 태종의 사냥터에도 찾아가고 태종이 앉아 있던 편전을 문밖에서 엿보고, 휘장을 걷고 보는 등 사관으로서의 직무를 다했다. 그러나 민인생은 여러 번 예()를 잃었다 하여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유배당했다. (태종실록 1401711)

 

이렇듯 민인생은 사관이 제대로 입시하지 못한 조선초기에 사필을 지키려다가 희생되었지만, 그의 희생은 사관제도 정착의 초석이 되었다.

 

한편 세종 때도 도승지 조사로가 사관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여, 환관들로 하여금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 사관들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마침 동지춘추(同知春秋) 윤회가 조사로가 하는 짓을 그르게 여겨 세종께 아뢰었다. 세종은 조사로에게 "사관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1423725)

 

이후에도 승지가 사관의 입직을 막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14571021일에 세조는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교형(絞刑)에 처하고, 영월로 귀양 간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어서 세조는 1024일에 송현수의 재산과 처첩을 공신들에게 분배하는 문제를 정리했다.

 

세조는 경회루 동편방(東偏方)에서 도승지 조석문을 인견했는데 사관(史官)이 따라갔다. 조석문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홀로 들어갈 때 사관이 마구 들어가는 것은 불가하다." 하며 이를 중지시켰다.

 

그런데 조석문이 들어갈 때,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가 조석문에게 "송현수의 딸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세조실록 14571024)

 

이날의 세조실록말미에는 윤사로의 사평이 실려 있다.

 

윤사로가 정현옹주(貞顯翁主)에게 장가들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성질이 요사하면서도 자못 경오(警悟)하였으며, 식리(殖利)에 능하여 외방의 농장(農莊)이 있는 곳에 여러 만석(萬石)을 쌓아 놓고, 서울 제택(第宅)의 창고도 굉장하여 몇 리 밖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무릇

주구(誅求)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런데 윤사로의 사촌 아우가 무오사화의 가해자 윤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