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역사 이야기

김세곤의 유럽여행단상(斷想)-독일 프랑크푸르트(26) 슈테델미술관-보티첼리, 단테의 ‘신곡’ 삽화를 그리다

김세곤의 유럽여행단상(斷想)-독일 프랑크푸르트(26) 슈테델미술관

 

보티첼리, 단테의 ‘신곡’ 삽화를 그리다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1550년에 발간한 『미술가 열전』 ‘보티첼리’ 편에서 “탐구심 강한 보티첼리(Botticelli 1445∽1510)는 심혈을 기울여 단테(1265∽1321)의 『신곡(神曲, 원제: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 일부에 주해를 달고 「지옥」 편 삽화를 넣어 인쇄했다. 그는 다른 작품 제작은 그만두고 그 일에만 매달린 나머지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적었다.

보티첼리는 단테의 『신곡』 삽화 91점을 그렸는데, 오늘날 독일 베를린에 있는 두 곳의 박물관과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의 교황청 도서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먼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에 대하여 살펴보자. 단테의 인생 56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265년 피렌체에서 출생 이후 1301년까지의 37년, 1302년에 피렌체에서 추방당하여 1321년에 라벤나에서 죽을 때까지 유랑생활 19년이다.

단테는 1265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5세에 친모가 별세하여 계모 밑에서 자란 탓에 단테는 모성애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품고 자랐다. 9세에 단테는 한 살 아래인 베아트리체(1266-1290)를 처음 보고 애정을 느끼는데, 18세(1283년)에 단테는 9년 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상냥한 인사에 단테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지상의 천사라고 생각한다.

 

1284년(19세)에 단테는 어릴 때 정혼한 처녀인 귀족 가문 젬마 도나티와 결혼하여 네 자녀(또는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1290년(25세)에 은행가인 시모네 바르디에게 시집간 베아트리체가 24세에 죽자 단테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한편, 단테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학, 논리학과 수사학, 중세의 신학과 철학, 자연과학과 천문학을 두루 섭렵했는데, ‘청신체(새롭고 감미로운 문체)파’라고 불리는 당대의 혁신적인 문학 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표적인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294년에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 서정시와 산문을 모아 『새로운 삶』을 펴냈다.

단테는 1295년부터 피렌체의 정치에도 참여하여 1300년에는 6인으로 구성된 피렌체 최고위원 행정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301년에 단테는 피렌체를 교황령으로 삼으려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설득하기 위해 로마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피렌체로 돌아오던 중에 흑당이 정권을 잡는 정변이 일어나, 백당인 그는 1302년부터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되어 19년에 걸쳐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방랑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중에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지방방언 피렌체어로 『신곡』을 집필하였다. 결국 그는 고향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한 채 1321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라벤나(Ravenna)에서 별세하였다.(그는 지금도 라벤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묻혀있다.)

 
피렌체에서 『신곡』을 설명하는 단테(도메니코 디 미첼리노, 1465년, 피렌체 대성당)
 

 

지옥도 (보티첼리, 1480-1490년 경, 바티칸 교황청 도서관 소장)
 

(참고문헌)

o 바르바라 다임링 지음·이영주 옮김, 산드로 보티첼리, 마로니에북스, 2005

o 도미니크 티에보·장희숙 옮김, BOTTICELLI, 열화당,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