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8) 야스쿠니 신사(6)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3.07.03 10:33
- 수정 2023.07.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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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신문(神門)을 지나 중간 도리 근처에서 참배전을 보았다. 본전은 참배전 뒤에 있는데 본전에는 246만6532주의 제신(祭神)이 합사되어 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신은 러일전쟁 8만8429(3.6%), 만주사변 1만7176 (0.7%), 중일전쟁 19만1250(7.8%), 태평양 전쟁 213만3915 주 (86.5%)이다. 여기엔 조선 출신자 2만1000여 주, 대만 출신자 2만8000여주도 포함되어 있다. (2004년 10월 17일 현재)
그런데 1978년 10월에 도조 히데끼 등 A급 전범 14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1985년 8월 15일에 나카소네 총리가 공식참배를 하여 중국이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크게 반발했다.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현대송 옮김,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 2005, p 78-79 ; 편 일본의 전쟁 책임 지로센터 ·박환무 옮김, 야스쿠니 신사의 정치, 동북아 역사 재단, 2011, p 6-10, )
필자 같은 한국인의 신사 참배는 절대 금물이다. 참배하는 즉시 친일파로 낙인 찍힌다. 참배전을 그냥 둘러보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래도 참배전 근처 사진은 몇 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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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전 옆은 참집전이다. 이곳을 지나니 유슈칸(유취관 遊就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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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슈칸은 메이지 12년(1879년)에 이탈리아 교사 카펠 레티의 설계로 건물을 지어 1881년 5월에 개회식이 거행되었다.
그런데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1932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 1945년 5월 도쿄 공습으로 전시실이 소실된 후에 개관되지 못하다가, 1986년에 재개관되었다. 이후 1999년 7월에 본관을 전면 개조하고 전시 방법과 전시 내용을 리뉴얼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유수칸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는 ‘특공 용사의 상’이 있다. 소위 가미카제(神風 kamikaze) 특공대 동상이다. (가미카제라는 말은 '신의 바람'을 뜻하는데 원래는 1281년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우연히 불어닥쳐 몽골 함대를 침몰시킨 태풍을 일컫는 말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태평양 전쟁(1941.12.7.-1945.8.15.) 말기인 1944년 10월 레이테만 전투부터 비행기 동체로 적함(敵艦)을 들이받았던 일본의 자살 공격대를 말한다. 일본은 평균 연령이 20세 정도인 자원병들을 모집하여 자살 공격을 감행했는데, 기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이착륙 바퀴를 없앴고, 기체에는 250kg 정도의 폭탄을 실었다. 특공 용사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출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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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특공 용사 동상 옆에는 ‘특공용사를 찬(讚)하며’로 시작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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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戰局 전쟁 판세)이 악화된 대동아 전쟁 말기에 육군항공 서미 소좌 이하 1,344명, 의렬정공대 오산 소좌 이하 88명, 전차대 단우 준위
이하 9명, 해상정 진전대 강부 소좌 이하 266명, 해군 항공관 대위 이하 2,514명, 특수잠항정 암좌 대위 이하 436명, 회천 상별부 대위 이하 104명, 진양(震洋) 석천 대위 이하 1,082명 계 5,843명의 육해 군인은 감연히 적함선(敵艦船)등에 돌입 산화(突入散華)하여 금일의 평화와 번영의 일본이 되는 초석을 다졌다. 이 지순숭고(至純崇高)한 순국 정신은 국민에게 경앙(敬仰)추도를 하게 한다. 영구히 그 정신이 계속되길 추모한다.
평성 17년(2006년) 6월 28일
재단법인 특공대전몰자 위령평화기념(祈念)협회”
참, 소름이 확 끼치는 비문이다. ‘태평양 전쟁’ 대신 쓴 ‘대동아 전쟁’이란 단어에선 일본의 침략전쟁 미화를 엿 볼 수 있다.
'대동아'란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더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1940년 7월 일본이 국책요강으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처음 사용했는데,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 일본 외상은 담화를 발표해 처음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그 요지는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결성하여 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 결성이란 일본·중국·만주를 중축(中軸)으로 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타이·말레이시아·보르네오·네덜란드령 동인도·미얀마·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정치적·경제적인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블록화였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는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고,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이란 미명(美名)아래 일본이 한 일은 피점령국의 주요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것이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식민지와 점령지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두산백과사전)
식민지 한국도 강제징용, 위안부 동원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류슈칸 1층 전시실에는 가미카제 특공대가 탄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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