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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과 무오사화

무오사화와 김일손 41회-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 (2)

무오사화와 김일손 41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 (2)

 

김세곤 (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1498729일의 연산군일기에 실린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을 계속하여 읽어보자.

 

일찍이 함양(咸陽 경상도 함양군) 고을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군재(郡宰 군수)에게 부탁하여 판자에 새겨 벽에 걸게 하였는데, 그후 김종직이 이 고을 원님이 되어 와서 말하기를, ‘유자광이 무엇이기에 감히 현판을 걸어놓았단 말이냐하고, 즉시 명하여 철거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유자광은 성나고 미워서 이를 갈았으나, 김종직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한창 융성하므로 도리어 스스로 납교(納交)를 하고 김종직이 졸()하니 만사를 지어 통곡했으며, 심지어는 왕통(王通한유(韓愈)에게 비하기까지 하였다.

 

김일손이 일찍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는데, 헌납(獻納)이 되자 말하기를 좋아하여 권귀(權貴)를 기피하지 아니하고, 상소하여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경알(傾軋 간책을 써서 모함함)하여 장차 (()의 당()’(당나라 우승유(牛僧儒이종민(李宗閔)을 이름. 우승유와 이종민이 서로 결탁하여 권세가 천하를 떨치니, 세상이 우·(牛李)라 칭하였음)을 이루려 한다.’고 논하니, 이극돈은 크게 노하였다.

 

급기야 성종이 승하하자 실록청이 설치되어 이극돈이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루는 사람을 물리치고 총제관(摠制官) 어세겸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이 선왕을 무훼(誣毁)하였는데, 신하가 이러한 일을 보고 상께 주달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는 그 사초를 봉하여 아뢰어서 상의 처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니, 어세겸이 깜짝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오래 있다가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유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을 가서 보고 먼저 세조께 은혜를 받았으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여, 그 마음을 감동시킨 뒤에 그 일을 말하였으니, 대개 노사신·윤필상은 세조의 총신(寵臣)이요, 한치형은 궁액(宮掖 궁에 속한 하인)과 연줄이 닿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따를 것으로 요량하여 말한 것인데, 과연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그래서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아뢴 것이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이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신수근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이 문신(文臣)들의 손안의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뭇 원망이 서로 뭉칠 뿐 아니라, 연산군 역시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文士)를 미워하여, 종내는 말하기를, ‘명예만을 노리고 군상을 업신여겨 나로 하여금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두 그 무리이다.’ 해서 항상 우울하고 즐거워하지 않아 한 번 본때를 보이려 했지만, 미처 손을 쓰지 못하던 찰나에 유자광의 아뢰는 바를 듣고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장대(奬待)를 특별히 후하게 하고, 명하여 남빈청(南賓廳)에서 죄수를 국문하게 했다. 그리고 내시 김자원으로 하여금 출납을 맡게 하니, 딴 사람은 참견하지 못하였다.

 

유자광은 옥사(獄事)를 자임(自任)하고 매양 내시 김자원이 교지를 전할 적에 반드시 앞에 나아가 공근한 태도를 극진히 보이고, 그 전교의 사연이 만약 엄하고 심각할 경우에는 스스로 상의 뜻에 맞았다 생각하여 다시 부복(俯伏)하여 마치 신사(申謝)하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 다 듣고 물러나와서 흔연히 자부하는 기색이 있어, 마침내는 좌중에다 대고 크게 말하기를, ‘오늘날은 바로 조정을 개배(改排 새것으로 갈아 바꿈)하는 때이니, 모름지기 이와 같은 큰 처치가 있어야 하며,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도당이 매우 성하여 변을 예측할 수 없으니, 방호(防護)를 엄밀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정을 파수하여 출입을 엄금시켰으며, 김일손 등이 국문을 받으러 갈 적에는 군사로 하여금 좌우로 붙잡고 다니게 했으며, 하옥(下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