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32회
- 성중엄 · 이목 · 임희재의 공초
김세곤 (칼럼니스트)
7월 24일 이목의 공초에 이어 성중엄도 공초하였다.
“이목이 공초한 것은 실상은 다릅니다. 이목이 ‘김일손의 사초가 네 방에 있느냐.’고 묻기에, 신은 ‘내 방에 나누어져 있다.’고 답하였을 뿐 다른 말을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목에게 말하기를, ‘일손의 사초는 상에 관련되어 기록해서는 안 될 일이 많이 기록되었다.’ 하였더니, 이목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기록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네가 기록하지 아니한 사실을 써 놓겠다.’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4일 3번째 기사)
7월25일은 국문 15일째였다. 이 날 윤효손, 성중엄, 이목, 임희재가 공초하였다. 먼저 윤효손이 공초하였다. 의정부 우참찬 윤효손은 이극돈과 마찬가지로 실록청 지관사(知館事)였다.
"신은 처음에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아픔이 골수에 들므로, 장차 계달(啓達)할 양으로 이극돈과 같이 상의하여 표지를 붙여 감봉(監封 감독한 내용을 봉(封)하고 도장을 찍음)하기로 하였습니다.
또 본시 김일손의 마음과 행실이 불초하다고 들었사온데 문장에 능하다고 칭찬하였을 리가 만무하옵니다. 일방(一房)의 낭청(郞廳)이 결원이 되자, 그 당상이 이목을 추천하여 낭청을 삼고자 하므로, 신은 이극돈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이 마음과 행실이 불초한 사람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하였사온즉, 신이 이목에게 김일손의 사람됨을 물었다는 것은 역시 그럴 리가 없사오며, 성중엄의 이른바 ‘날짜에 따라 기사(記事)를 하지 않아 어느 날 아래에 편차(編次)해야 할지 모른다.’고 한 것은 역시 신이 말한 것이 아니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1번째 기사)
윤효손의 공초는 ‘모른다’는 일색이다.
이어서 추관이 성중엄을 형장 심문하니, 성중엄이 공초하였다.
"윤효손의 이른바 ‘김일손의 사초(史草)는 날짜에 따라 기사(記事)하지 않아서 《실록》에 실을 수 없다.’ 한 것과, 이극돈의 이른바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등의 말은 신이 확실히 이목에게 말했으나, 나머지는 신이 말한 것이 아니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2번째 기사)
이윽고 이목이 공초하였다.
"만약 성중엄·윤효손이 말한 것이 아니었으면 일이 발각되지 아니했을 터인데, 어떻게 김일손에게 편지를 상통했겠습니까. 또 성중엄의 공초한 바에 의하면 ‘김일손의 사초는 임금과 관련되어 기록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많이 기록했다고 하자, 신이 ‘나는 마땅히 네가 기록하지 않은 일을 써 놓겠다고 답했다.’는 것은 모두가 헛말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3번째 기사)
다시 윤효손이 공초하였다.
"신이 창졸간이라 늙고 혼미한 탓으로 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 성중엄과 대질하고 다시 생각해 보니, ‘김일손의 사초(史草)는 한갓 날짜에 따라 기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기록해서 안 될 일도 많이 기록했다.’는 등의 말은, 실로 신이 말한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4번째 기사)
또 윤효손은 공초를 이어갔다.
"이목이 공초한 ‘김일손은 어떠한 사람인가?’ ‘문장에 능한 자다.’ 등의 말은 처음에는 해가 오래되어 기억을 못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실로 신이 말한 것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7번째 기사)
이처럼 윤효손은 처음에는 성중엄과 이목과 다른 진술을 했다가 나중에는 성중엄과 이목의 공초가 맞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추관(推官)이 이목이 ‘예로부터 사관(史官)이 직필(直筆)로 인해 화를 받았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내용이 있으며, 또 ‘김일손의 사초를 보지 못했다.’ 한 것도 거짓이라 하여, 이목을 형장 심문하였다.
이에 이목이 공초하였다.
" ‘사관이 직필로 인하여 화를 받았다.’라고 말한 것은 역대 사직(史職)을 통하여 논했을 뿐이며, 김일손의 사초는 신이 보지 못했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6번째 기사)
25일에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도 공초하였다.
"신의 편지에 이극돈을 지적하여 소인이라고한 것은 지난 을묘년에 신이 이목 등 20여 명의 사람과 상소하여 설재(設齋 사찰의 승려에게 공양함.)를 논한 일로 의금부에 구속당했을 때에 이극균이 판부사(判府事)가 되어 평반(平反 송사를 재조사하여 전보다 가볍게 함)에 힘썼으므로 신은 이목과 말하기를 ‘이극균은 바로 평상(平常)한 재상이다. 그 형 이극돈은 행실이 이극균에도 미치지 못하여 장돈(章惇)과 같은 점이 있다.’고 하였기에 그렇게 쓴 것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5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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