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14회
- 연산군,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형장 심문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사헌부 집의 이유청· 사간원 사간 민수복·유정수·조형·손원로·신복의·안팽수·이창윤·박권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김종직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대간의 의견을 주도한 사헌부 집의 이유청(李惟淸 1459~1531)과 사간원 사간 민수복이었다. 이유청은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고손자로서, 이유청은 1491년에 사헌부 지평, 1493년 사헌부 장령, 1497년부터 사헌부 집의로 일했다. 민수복은 1497년 1월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498년 5월에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연산군은 어필(御筆)로 사헌부 집의 이유청과 사간원 사간 민수복등의 논의에 표시를 하고, 윤필상 등에게 보이며 전교했다.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의를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 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현장에서 이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받았는데, 모두 다른 뜻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에서 사헌부, 사간원등 삼사가 직접 처벌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화의 주요 처벌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김범 지음,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5, p 115)
7월 21일에 집의 이유청 · 사간 민수복 등은 국문을 당했다. 이들은 "신 등이 망령된 의논을 했을 따름이옵고, 딴 사정은 없사옵니다"라고 공초했다.
연산군은 "대간 등이 스스로 이르기를, ‘임금과 더불어 시비를 다툰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善)을 진술하고, 사(邪)를 막아 버리는 것을 공(恭)이라 이른다.’ 하였지만, 큰일을 당하여 그 의논이 이와 같으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이들을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라고 전교했다.
이윽고 윤필상 등이 장 1백 대에 유배 3천리로 할 것을 아뢰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김일손 사건과 함께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이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은 연산군은 김종직을 대역(大逆)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윤필상 등이 김종직이 지은 ‘도연명의 술주시(述酒詩)를 화답한 시’에 대하여 아뢰었다.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하였는데, 서문에 말한 것은 조의제문보다도 심한 점이 있어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 술주(述酒) 시를 읽고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탕동간(湯東磵 동간은 송나라 탕한(湯漢)의 호)의 주소(註疏 본문에 대한 주해)를 보고서야 소상히 영릉(零陵: 동진의 공제)을 애도하는 시임을 알게 되었다. 아아, 탕공이 아니었다면 유유(劉裕)의 찬시(纂弑)의 죄와 도연명의 충분(忠憤)의 뜻이 거의 숨어버릴 뻔하였도다. 도연명이 은어(隱語)를 쓰기 좋아한 것은, 그때는 유유가 한창 날뛰는지라 그의 힘이 용납될 수가 없는 형편이니, 그는 다만 몸이나 깨끗하게 할 뿐이요, 언어 가운데 그런 일을 드러내서 일가족이 멸족(滅族)당하는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천년 뒤에 태어났으니, 어찌 유유가 두려울 것이냐? 그러므로 유유의 흉역(凶逆)을 모조리 폭로하여 탕공의 주소(注疏) 끝에 붙이노니, 후세의 난신적자가 나의 시를 보고 두려워 할 줄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외람되이 『춘추』의 일필(一筆)에 견준다 하리라' 했는데 그 시(詩)는 없어졌다.”
윤필상 등은 그 뜻을 해석하였다.
" ‘이는 영릉을 애도하는 시다.’라고 한 것은, 영릉을 노산에 비한 것이요, ‘유유의 찬시의 죄’라 함은 유유를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춘추』의 일필에 비교한다' 함은 맹자가 ‘『춘추』가 지어지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 말했으므로 『춘추』에 비한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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