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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김세곤의 조선 역사 기행(27)] 압구정(狎鷗亭) (6) - 김시습, 한명회 시를 비평하다.

[김세곤의 조선 역사 기행(27)] 압구정(狎鷗亭) (6) - 김시습, 한명회 시를 비평하다.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3.01.12 10:40
 

1481년 7월 1일에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를 아뢰니, 성종은 어서(御書)를 내렸다. 그 말미(末尾)는 아래와 같다. 

"죄는 크나, 여러 조정의 원훈이고 나에게도 구은(舊恩)이 있으니, 직첩(職牒)을 거두고 성밖에 부처(付處 죄인을 거주지를 한정하여 귀양살이 시키는 것)하는 것이 어떠한가? 의정부에 보이라."

이에 영의정 정창손·좌찬성 한계희·우찬성 강희맹이 "한명회는 임금의 장인으로서 정난(靖難)의 큰 공훈이 있으니, 부처를 제감(除減)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는 의견을 냈다. 

우의정 홍응·좌참찬 이철견·우참찬 이승소는 성상(聖上)의 하교가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러자 성종은 영의정 정창손등의 의견을 좇아 유배는 면하고 직첩만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좌부승지 이세좌가 아뢰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불경(不敬)에 관계된 일이면 반드시 중죄(重罪)를 주었습니다. 한명회는 불경이 막심한데, 직첩만 거두는 것은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외방(外方)에 부처하였다가 중국 사신이 알고서 용서하여 주기를 청하게 되면 처치하기 어려울 것이며, 대간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죄주기를 청하여 허락받고야 말려고 할 것이다. 승지는 다만 출납(出納)할 따름이니, 다시 말할 것 없다.“

 

다음 날인 7월 2일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상소하였다. 

 

"한명회의 무례한 형적은 말과 낯빛에 나타났으니, 율문(律文)대로 시행하소서. 또 정창손은 임금과 신하의 분별을 헤아리지 않고, 한명회를 감싸려고 그의 공훈을 논하였으므로, 국문하소서."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명회의 죄를 엄히 처벌하라고 상소하였지만, 
성종은 "이미 직첩을 거두어 뭇사람을 경계하였고, 죄가 중하기는 하나 공도 큰데, 또 무엇을 더하겠는가?"고 어서를 내렸다.

 

그러자 대간이 또 차자(箚子)를 올렸다. 

"영의정 정창손은 수상으로서 한명회의 불경을 들었으면 백료를 거느리고 죄주기를 청해야 옳은데, 한명회의 공훈이 중하다는 것을 드러내 말하고 그 죄를 청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구제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한명회가 있는 줄만 알고 전하께서 계시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죄가 같으니 국문하게 하소서."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7월 4일에 사헌부 지평 김영정과 사간원 정언 윤석보가 한명회의 죄를 청하였으나 성종은 직첩(職牒)을 거두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전교했다. 

 

7월 15일에 성종은 경회루에서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두 중국 사신이 "요즈음 한명회가 보이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성종은 한명회는 죄가 있어서 파직되었다고 답했다.

 

이어서 두 사신이 "한명회는 훈구대신이니 용서해주라“고 하자, 성종은 
"한명회의 죄는 무례(無禮)에 관계되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답했다. 


# 김시습, 한명회 시를 비평하다. 

 

1482년경에 매월당 김시습이 서강(西江)을 지나다가 압구정에 잠시 들렀다. 정자엔 한명회가 지은 시판(詩板)이 붙어 있었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쳤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백발이 되어선 강호에 누웠노라.

 

한명회의 시를 본 김시습은 부(扶)를 위(危)로 고치고, 와(臥)를 오(汚)로 고쳐 놓고 떠났다.   

 

靑春危社稷 (청춘위사직)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더니 
白首汚江湖 (백수오강호)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나중에 김시습의 시를 본 한명회는 곧바로 자신의 시판을 떼어 버렸다 한다. (허경진 옮김, 매월당 김시습 시선, 평민당, 2019, p 145)

 

한편 압구정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한명회는 평판 관리에 나섰다.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성균관에 서적을 기증하는 등 유생들의 환심을 샀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허울 좋은 명예와 화려한 추억뿐이었다.

 

 

백구야 휠훨 날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성상(聖上 성종 임금)이 날 버리시니 
너를 좇아 여기 왔노라.

 

김시습 영정 (논산 무량사)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