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조선 역사 기행(22)] 압구정(狎鷗亭)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2.10.2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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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을 갔다. 지하철 압구정역에서 내려 압구정동 현대 1차 아파트를 찾았다.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지은 ‘압구정터’ 표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현대1차아파트 71동과 73동 사이에 ‘압구정터(狎鷗亭址)’라는 큰 돌과 표시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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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압구정터 표시석을 읽는다
압구정터
조선조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영의정을 지낸 권신(權臣) 한명회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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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狎鷗亭)」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에 나온다. 이를 읽어보자.
【누정】 압구정(狎鷗亭)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가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 1415~1479)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1475년)에 또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압구정 주인이다.”하고, 시를 지어 보여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 예겸의 기문에, “(전략) 천순(天順) 1년(1457년) 겨울에 조선의 이조 판서 한명회 공(한명회는 1457년(세조 3년) 8월 14일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 필자 주)이 조선 국왕의 명을 받들고 들어와 봉사(封事)를 천자에게 바치었다. 공은 전에 별장을 한강가에 두고 정자를 그 가운데 지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다.
내가 이전에 사신으로 조선에 가서 한 차례 놀았으므로 그 좋은 경치를 안다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름을 청하고 기문 쓰기를 부탁하였다. (예겸은 1450년(세종 32) 윤1월1일에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며 정인지 ·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며 윤 1월 14일에 한강에서 유람을 즐겼던 인물이다. 「세종실록」에 나온다. - 필자 주)
내 이름 짓기를 압구(狎鷗)라 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자이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닌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찌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올라 공중을 휘 날은 뒤에라야 내려앉는다. 새이면서도 이상한 낌새를 보는 것이 이와 같은 까닭에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바다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수백 마리 내려오면 아무런 낌새가 없는 것으로 여겼고, 갈매기를 붙들어 놓고자 하면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오직 올바른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한명회)은 큰 키가 옥처럼 섰고 거동과 풍도가 빼어나고 위대하여, 번국(藩國 조선)에서 벼슬할 때, 공명하게 인재를 뽑아 쓰고 천조(天朝 중국)에 사신으로 와서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절을 보였으니, 조선에 돌아가면 등용됨이 융숭할 것이어서, 어찌 갈매기와 친할 수 있겠는가? 만물의 정은 반드시 권력을 잡으로려는 욕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욕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 사람들은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고자 할 것이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부귀와 이득 그리고 녹봉에 대하여 자신의 욕심이 없는 것같이 한다면, 이는 도(道)에 다다른 높은 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정자를 압구라 이름함이 아마도 마땅할 것이다.
옛날 송나라 충헌공 한기(韓琦 1008~1075 : 쓰촨[四川]의 기민(飢民) 190만 명을 구제하고, 서하(西夏)의 침입을 격퇴하여 30세에 이미 명성을 떨쳐 추밀부사가 되었다. 이후 재상에 올랐으나 왕안석과 대립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도 일찍이 정자 이름을 압구로 하니, 문충공(文忠公) 구양수(1007~1072 당송팔대가이다)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한 절개는 금석과 같아, 공훈과 덕이 함께 높아 옛날과 지금도 비치었다. 어찌 기심(機心 교사한 마음)을 잊어 갈매기가 믿는데 그치겠는가. 만물을 다스리는 것도 본래 무심(無心)함이다.’ 하였다. 한기가 시를 얻고 기뻐 말하기를, ‘영숙(永叔 구양수의 자)이 나를 아는구나.’ 하였다.
조선과 중국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사람의 마음은 같고, 고금이 비록 다름이 있으나 우리 도(道)는 다르지 아니하다. 내가 공에게 바라는 것도 자못 이와 같다. 공의 마음에도 역시 나더러 잘 안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혹시 잘 안다고 여기거든 이 말로써 정자 가운데에 걸어 기문으로 삼으면 다행이겠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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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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