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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코로나 전쟁

임진왜란 다시 보기 - 5-6회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5) - 도망치기 바쁜 경상감사와 수령들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 밀양부사 박진의 용맹

 

1592415일에 동래성에서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 소산역에서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을 만났다. 박진은 급히 동래로 가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소산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박진은 이각에게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이 위태하니 내가 앞을 막거든, 공은 그 뒤를 지키라하면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군 앞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각은 도망쳐 버렸다. 후방이 없어지자 박진도 후퇴하여 밀양으로 돌아왔다. (박동량 기재사초’)

 

416일에 고니시는 길을 나누어 한패는 언양을 침범하고 다른 한패는 밀양을 침범했다. 이때 박진이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 5백 명과 함께 작원강(鵲院江)의 좁은 잔교(棧橋)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왜군이 감히 진격할 수 없었다. (작원강 잔교는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 작원마을과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사이에 있는 험한 벼랑길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라고 적혀 있다.

 

얼마 뒤에 왜군이 양산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러자 잔교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박진도 성으로 돌아와 무기고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하였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왜적의 목 2()을 벤 다음에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박진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 도망치기 바쁜 경상감사와 수령들

 

한편 소산역에서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은 다시 좌병영(울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좌병영을 지킬 생각은 않고 밤에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천 필을 함께 싣고 가게 하고, 이각 역시 새벽을 틈타 도망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414)

 

5월에 이각이 임진강 진중에 나타나자, 도원수 김명원이 그를 참수했다. 이각은 적을 보기도 전에 수차례 도망친 겁쟁이였고, 탐욕은 나라가 어수선할 때도 나타나 극형에 처해졌다.

 

한편 이각 후임으로 경상좌병사가 된 박진은 경주성 탈환의 공을 세웠다. 92일에 선조는 그에게 양피(羊皮) 옷 한 벌을 특별히 하사했다.

 

1592418일에 구로다의 3번 대 왜군 11천 명이 김해를 공격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남문을, 초계 군수 이유검은 서문을 지켰다. 그런데 이유검은 야경(夜警) 한다고 핑계 대고 달아났고, 서예원은 이유검을 쫓아간다며 도망가서 성이 함락되었다. 나중에 이유검은 참형 당했다. (선조실록 1592510)

 

이렇게 수령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경상좌수사 박홍, 방어사 성응길, 조방장 박종남·변응성, 안동 부사 정희적, 안동 판관 윤안성, 풍기 군수 윤극임, 예천 군수 변양우 등이 모두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 도망갔다. (조경남 난중잡록’)

 

경상감사 김수도 변고를 듣고 진주에서 동래로 달려가다가 왜적에 놀라 다시 진주로 갔다가 거창으로 피신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피난하라고만 했다.

 

임진왜란의 재앙은 어찌 보면 국가를 보위해야 할 경상도 지역 감사와 병사 · 수사 그리고 수령들의 무능과 무책임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6) - 군사 300명도 차출 못 한 조선 조정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왜군이 부산을 침탈한 지 5일째 되는 1592417일 이른 아침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한양 조정에 도착했다.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첫 보고였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횃불과 연기)는 아예 작동 안 했다.

 

그런데 박홍의 보고는 엉성했다.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에 가득하옵니다.”

 

대신들은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이 정무를 의논하는 곳. 지금 창덕궁 희정당 앞 매점이 빈청이었다.)에 모여 선조를 직접 뵙기를 청했다. 그런데 선조는 무슨 영문인지 대신들과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대신들은 서면 보고했다. 이러자 선조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부지역에,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동부지역에, 조경을 우방어사로 서부지역으로 내려보내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 문경 새재로 더 친숙함,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 사이)을 지키게 하고, 경주부윤 윤인함을 겁이 많고 유약하다 하여 친상(親喪)중에 있는 전 강계부사 변응성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병력이 없어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92414)

 

한편 선조는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즉시 잡아 오라 하였다. 15913월에 선조가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접견할 때,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아뢴 정사(正使) 황윤길과 달리, 부사(副使) 김성일은 왜적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아뢰어 그 죄를 묻고자 함이었다.

 

418일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도착했고, 여러 고을이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연달았다. 이러자 한양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일은 3백 명의 정예병도 못 구해 3일이 지나도록 한양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일이 혼자서 먼저 떠나도록 하고, 별장 유옥이 군사를 모집하여 뒤따라가도록 했다.

 

당초에 이일은 정예병 3백명을 데려가려고 병조의 군사 선발 장부를 입수하여 살펴보니 시정잡배와 서리(胥吏) · 유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임시 점검했더니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 과거시험 답안지 종이)을 들고 있는 유생들과 평정건(平頂巾 관청 서리가 쓰는 두건)을 쓰고 있는 서리(말단관리)들이 거의 전부였다. 게다가 이들은 징병을 면제해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2009, p 56 )

 

418일에 선조는 병조판서 홍여순을 김응남으로 경질했다. 홍여순은 맡은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군졸들의 원망이 많았다. 이어서 선조는 류성룡을 장수들의 감독과 격려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 김응남을 부체찰사로 삼았다.

 

20일에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제수하고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하면서 말했다. “이일 이하 누구든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참()하라.”

 

이윽고 선조는 1591년에 서인 정철 일당(一黨)으로 몰려 의금부에 갇힌 전() 의주목사 김여물을 석방하여 신립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신립과 군사 수백 명이 출정하자 도성 사람들은 시장 문을 닫고 지켜보았다. (선조실록 1592417)

 

백성들은 1583년에 함경도에서 여진족 이탕개의 난을 진압한 신립이 이번에도 왜적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선조가 애지중지한 신성군의 장인인 신립은 매우 오만불손했다.

 

159241일에 신립이 류성룡의 집을 찾았다. 징비록에 나온다.

 

류성룡이 신립에게 물었다.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이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칼만 믿고 있었지만 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말했다.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외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 사람들이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리를 수습할 수 있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매우 걱정스럽소.”

그래도 신립은 전혀 반성하거나 깨달은 기미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유성룡 지음 · 김문수 엮음, 징비록, 2009, p 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