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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해방정국 3년 (7) 이승만, 공산당을 비난하다.

해방정국 3(7)

이승만, 공산당을 비난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승만이 귀국한 지 7일이 되는 19451023일에 조선호텔에서 한국민주당·국민당·건국동맹·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우익의 거의 모든 정당 및 사회·문화 단체 대표등 200여명이 모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를 결성하였다.

 

회장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는데 이승만은 수락 연설에서 우리의 염원은 하나뿐이니 힘도 하나, 소리도 하나로 뭉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좌우익의 평화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구의 임시정부와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이 분열의 핵이었다. 송진우의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112일 오후 2시 천도교 대강당에서 한국민주당·국민당·건국동맹·조선공산당의 대표자와 50여 군소정당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2차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좌익과 우익은 임시정부냐 인민공화국이냐를 왈가왈부하며 다시 격론을 벌였다.

 

이 날 회장 이승만이 기초한 분단반대, 신탁통치 반대, 조선에 대한 점령국 대우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4대 연합국에 보내는 선언서를 채택하려는 순간, 박헌영은 친일파 제거에 의한 민족통일 원칙을 포함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싸우지말고 합심하여 하나로 뭉치자고 거듭 호소했지만 박헌영은 무조건 하나로 뭉치자는 것은 무원칙론이다. 그런 통합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까지 들어간 것이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인 113일에 조선공산당은 독촉비판 성명을 냈다.

 

금일에 있어 조선 문제를 해결함에는 반드시 아래와 같은 원칙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를 철저히 조선으로부터 구축 숙청할 것, 이것은 조선 민족 전체의 요망이며 절대 명령이다.

 

둘째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내걸고 이 원칙 밑에서 모든 민주주의 요소(각 당, 각 파, 각 계급을 물론하고)의 집결로서 전조선 민족 통일 전선을 결성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선포할 것이다.

 

셋째는 이 통일전선을 기초로 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할 것이요, 이 통일 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 기본 과업을 실시할 것이며 특히 조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넷째는 전조선 민족 통일 전선은 통일 정부를 지지하되 이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을 밟아 나가는 가를 항상 검토하여 자기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것이다. 조선공산당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의미의 원칙적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일에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모인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상과 같은 진실한 의미의 통일 전선과는 퍽 멀리 떨어져 있음을 지적한다.”

 

116일에 좌익계의 전국청년대표자대회는 만일 이박사가 인민공화국 주석을 거부한다면 지도자로 지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 통일전선 분열의 최고 책임자로 규정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러자 이승만은 다음 날인 7일에 방송을 통해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 등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1121일에 이승만은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각 지방에 소요를 일으키며 외국인을 배척하는 선전과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인심을 이반시키며 결국에는 중국과 폴란드처럼 내전을 일으켜 민족 간에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승만은 반공(反共)주의자로서의 노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25일에 독촉과 결별을 선언하고 이승만과 완전히 헤어졌다.

 

( 참고문헌 )

 

o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p 1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