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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을사늑약 톺아보기 (29)

을사늑약 톺아보기 (29)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51216, 이완용 등의 상소는 계속된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그랬다. 고종은 조약 체결에 반대한 참정(총리)대신 한규설을 면직시켰지만, 1118일에 법부대신 이하영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직 상소는 반려했다. 1122일에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임시로 의정부 의정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125일에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올린 사직 상소에 대해 비답하기를, "전번 상소문에서 말한 것인데 왜 또 반복하는가?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말고 즉시 나와 공무를 보라."고 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1128일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부 참정(총리)대신으로 승진시켰다. 이게 고종의 이중성이다. 문책해야 할 을사조약 책임자를 중용하다니.

 

128일에 고종은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임시로 의정부 의정 대신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고, 1213일에는 이완용을 외부대신 사무 서리로 임명했다.

 

1214일에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완용이 아뢰었다.

 

"올해 1117일에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나라 공사(公使)들을 모두 즉시 소환한다는 내용으로 신칙(申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은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90512144번째 기사)

 

이완용은 대한제국 외교업무 마지막 청산 작업을 주도했고,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대한제국 외교관들을 소환했다.

 

한편 이완용 등의 상소는 이어진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 터무니 없는 말로 죄에 빠지게 함)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이완용 등은 기고만장하다. 을사오적은 고종의 비호를 믿고 그들을 탄핵한 이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

 

이런 을사오적의 장문의 상소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

 

고종의 답변은 참으로 황당하다. 을사오적을 비호하고 사직을 만류하다니.

 

이제 을사늑약 연재를 마무리한다. 끝으로 을사 5고종 책임론에 논쟁을 살펴본다.

 

먼저 을사 5논쟁이다. ‘을사늑약은 박제순 · 이완용 · 이지용 · 이근택 · 권중현 때문에 체결된 것인가? ‘을사 5에게만 전적인 책임이 있는가?

 

이에 대하여 윤덕한은 저서 이완용 평전에서 을사조약의 책임을 오로지 5명에게만 묻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 인식의 결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윤덕한은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대신들과 함께 문안 수정에 참여하여 사실상 조약에 동의했다. 법무대신 이하영은 이토에게 찬성판정을 받았고, 친일 주구 노릇을 하였다. 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은 고종과 이토 사이를 오가며 어느 대신 못지 않게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도외시 한재 을사조약의 책임을 오로지 5적에게만 묻는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역사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윤덕한, 이완용 평전, p 222-226)

 

강동진도 을사 5이 아니라 법부대신 이하영과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포함시켜 을사 7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 p 158)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108월에 대한제국이 망했을 때 일제는 76인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이들을 장차 식민통치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당연히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 ·이재극 소위 을사 7은 작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아울러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참정대신 한규설도 포함되었는데, 한규설은 작위를 반납했다. (서영희 지음,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p 254-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