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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의 고종 황제 평가

미국 공사 알렌의 고종 평가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호레이스 알렌 (1858~1932)은 한말 외교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절명 직전의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1885229일에 설립된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 원장이 되었다.

 

이후 알렌은 18877월에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일했다. 1890년에 한국에 돌아온 알렌은 미국 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하고 18977월에 전권공사가 되었고 1905329일에 해임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08년에 조선견문기(Things Korean)를 발간하였고, 알렌의 일기등을 남겼다.

 

19039,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5개월 전에 알렌은 미국 워싱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와 일본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지지하여 언쟁도 있었다. 화난 루스벨트는 그를 파면시키려 했는데 국무장관이 겨우 말려 견책을 받았다.

 

1014일에 알렌은 고향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서울의 캘훈이 보낸 편지 한 장을 받았다.

 

레이몬드 크럼(양지아문 수석 측량기사 - 필자 주)이 이용익(내장원경 및 양지아문 총재- 필자 주)을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한다. 자기가 만약 공무를 띠고 미국 워싱톤에 파견된다면 국무성에 콜브란·보스트위크의 상환청구가 불법행위라는 것, 그리고 나를 공사직에서 해임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917일까지만 해도 고종은 이 계약에 동의하려 하지 않았고, 크럼이 대한제국 외부로부터 약간의 서류를 입수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이 일을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콜브란·보스트위크은 18981월에 서울에 설립하였던 한성전기회사 (초기 자본금: 30만 원, 사장은 한성부 판윤 이채연)의 미국 파트너로서, 이들은 발전소와 전차 건설사업을 수행했다.

 

18995월에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의 단선궤도의 전차가 개통되었다.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였다. 고종황제가 청량리 바깥에 있는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을 자주 다니면서 연을 타고 많은 신하를 동행하는 일로 인한 재정 낭비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전차는 1900년에는 원효로 4가까지 확대되었다.

 

전등 사업은 1898년에 시작해 1900년에 완성한 동대문 전등발전소를 들 수 있다. 이리하여 한성에 점화된 전등 총수는 55천 촉 등이었다. 1903년에는 전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마포에 제2발전소, 남대문에 변전소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콜브란·보스트위크은 한성전기회사로부터 전차 및 발전소 건설비 200만 원을 아직 못 받고 있었다. 이 비용은 한성부가 궁내부에 청구하였지만 궁내부는 지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자 알렌은 1903930일에 워싱톤의 주미한국공사 조민희에게 콜브란 · 보스트위크의 건설비 청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고종에게 전문을 보낼 것을 요청했고, 조민희는 이에 동의했다. (알렌 지음 · 김원모 옮김,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p 278-279)

 

한편 알렌은 18989월부터 고용된 측량 주임기사 크럼이 한성전기회사의 자본금 30만 원의 7배나 되는 건설비 200만 원 청구 문제를 미국 국무성에 가서 해결하겠다 하고 또한 자기를 해고할 수 있다고 한 제안에 대하여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

 

약간 화난 알렌은 캘훈이 보낸 편지 사본을 모건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알렌은 이 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고종 황제가 허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해치는 일에 동의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고종 황제를 포기한 지 오래다. 황제가 만기친람(萬機親覽 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핌)하기 때문이다.

 

I can scarcely believe that the Emperor - weak as he is- would cosent a thing that would harm me, but I have long given him up as liable to do most anything.”

 

만기친람은 황제가 모든 일을 다 챙긴다는 부정적 의미가 더 강한 단어이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즉 황제 1인의 나라였다.

 

이 일기 뒤에 알렌은 다음 글을 덧붙였다.

 

나는 오히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사태에 관해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흥분이 되는 전쟁 발발뉴스를 듣고 싶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전승을 거둔 어느 한쪽이 진정한 한국의 대군주 지위를 차지해서 허구적인 대한제국을 파멸시키고 한국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부여할 것이다.” (위 책, p 288-289)

 

알렌은 허구적인 대한제국’ (Fiction of Korean Empire)’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미국 공사 알렌의 고종 평가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361일에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은 새로 개통된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돌아본 뒤 영국, 프랑스를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했다. 그는 930일에 워싱턴에서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했다. 이 면담은 극동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알렌은 친러배일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여 친일론자인 루스벨트 대통령과 격론이 벌어졌다.

 

10월에 알렌은 고향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머물렀고, 1020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1120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한국에 돌아온 알렌은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견책을 받아 의기소침했다.

 

한편 1903년 말의 대한제국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동학교도들이 일본인을 내쫒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일본과 러시아는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이러자 영국 정부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해병대가 승선한 순양함을 제물포에 파견했다. 이어서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도 경쟁적으로 군함을 제물포에 보냈고, 러시아도 19031217일에 순양함 두 척을 제물포로 보냈다.

 

190412일에 고종은 고위 대신을 통하여 미국공사관에 파천을 요청했다. 알렌은 전쟁이 터지면 황제가 공사관으로 오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프랑스공사관에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고종은 프랑스 공사관에 피신할 것을 타진했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러자 고종은 121일에 전시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고 중국 지푸에 있던 밀사 이학균이 이를 각국 정부에 통고하였다.

 

국외중립을 선언의 주동 인물은 고종을 직접 움직인 이용익을 비롯하여 이학균 ·이인영·현상건,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 및 벨기에인 고문 델코안뉴(M. Delcoigne) 등이었다.

 

국외중립 선언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한반도의 전신 업무가 이미 일본의 실질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었으며 왕궁 내부에까지 첩자가 많이 침투해 있는 상황에서 발표 직전까지의 보안 유지가 어렵고 외부의 방해 공작도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의 직접 명령을 받은 특사가 해외에 나가 기습적으로 각국에 타전하는 방법을 택하였던바, 이것이 121일에 발표된 지푸선언(芝罘 宣言)’이었다.

 

외부대신 이지용의 명의로 각국에 타전된 전시 국외중립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간에 발생하고 있는 미묘한 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그 두 국가와 한국과의 사전 협의가 어떻게 되든지를 불문하고 엄정중립을 지킬 확고한 결심을 하였음을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선언하는 바이다

 

이 국외중립 선언은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평소 중립 선언을 반대하고 한·일 밀약 체결에 진력하던 외부대신 이지용조차 자기 명의가 도용당하였을 뿐, 이 성명(聲明)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을 더욱 놀라게 했다.

심사숙고한 일본은 한국의 중립을 승인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무라 외상은 주한 하야시 공사와 긴밀한 토의를 거친 후에 중립을 논할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 측의 반응은 모호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의외로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에 고종은 실망했으리라.

 

그런데 미국은 아예 회답조차 안 했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본국 정부에 한국의 전시 국외중립 선언에 대한 회답을 자기 자신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한국 정부에 보낼 것인지 여부를 여러 차례 질의하였는데도 미 국무부는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았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언급할 정도로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에 의한 통제가 한국인의 악정(惡政청의 간섭·러시아의 관료적 독선보다 오히려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다.

 

오로지 영국 정부만이 122일에 국외중립을 승인했다. 이러자 고종은 러일전쟁이 나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 때 영국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영국 공사 조던에게 타진했다. 하지만 영국 공사는 고종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 참고문헌 >

 

o 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백년동안, 2020, p 350-354

o 량치차오 · 최형욱 엮고 옮김,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글항아리, 2014, p137

o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와이즈맵, 2020, p 267-269

o 알렌 지음 · 김원모 옮김,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미국 공사 알렌의 고종 평가 (3)

샌즈의 영세중립화론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4121일에 추진한 대한제국의 국외중립(局外中立) 선언의 원조는 1900년에 대한제국 고문관 샌즈가 추진했던 영세중립화론이었다.

 

189710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고종은 자주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 시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간의 세력균형이 모처럼 이루어진 때여서 미국 공사 알렌의 지적처럼 외견상으론 유일하게 한국에 종주국이 없었던 시기였다. (19066월 미국 해군대학 강연에서)

 

1899년 봄에 알렌이 휴가차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때 고종은 미국이 열강의 협조를 얻어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고 중립화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해 줄 것을 희망하면서 알렌이 직접 미국 정부와 교섭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알렌은 매킨리 대통령과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은 미국의 불간섭주의를 이유로 고종의 요청을 거절했다.

 

한편 고종은 약관 26세의 정통 직업외교관인 주한미국공사 서기관 샌즈에게 중립화 정책 추진을 맡겼다. 18991021일에 궁내부 고문관에 취임한 샌즈는 취임하자마자 한국이 러·일 양국의 대립에서 벗어나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영세 중립국이 되려면 내정개혁과 교육개혁부터 해야 한다고 정부 고관을 설득하였다.

 

하지만 샌즈의 내정개혁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우선 궁내부 관리들부터 부패했으며 특히 엄귀비는 샌즈의 내정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샌즈는 1930년에 발간한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당초에 환상 속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희망과 관심을 잃은 채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강국인 러시아와 일본에 그들의 운명을 완전히 던져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내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대궐 안에는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일본과 러시아가 싸울 경우 조선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중립화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조선과 모든 나라 사이에 절대적인 평화조약을 보장하려면 일차적으로 내정개혁과 교육 개혁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보통 교육이 없었다. 과거시험은 현대적인 조건과는 맞지 않았고 공직 선발에는 개인적 친분과 뇌물수수가 폭넓게 자행되고 있었다. 문과에 합격하려면 문중 배경이 좋거나 엄청난 뇌물을 바쳐야 했다. 과거 합격자는 관직을 얻고자 쓴 경비를 국민들에 대한 과세의 구실로 거두어들였다. 자유재량적 과세는 국내적 무질서의 가장 큰 원천이 되었다. (한편 과거제도는 1894년에 폐지되었다.)

 

지금도 관직 임용에 뇌물 수수 관행이 너무도 심하여 이를 직업으로 삼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어떤 지방 관직을 얻는데 필요한 뇌물 준비금을 후보자에게 빌려주고 한 달에 토지와 농산물 거래때의 통상적인 이자인 12%로 빌려주고 공직을 얻은 뒤 짧은 기간 내에 되받아 냈다.

 

뇌물은 황제에게까지 올라가는 데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뇌물을 그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땅과 백성은 황제가 바라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왕은 곧 국가이다. (이는 18998월에 제정한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에 명기되어 있다.)

 

모든 땅과 백성은 황제의 것이고, 모든 소득은 황제 것이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처분한다. 관리들은 황제의 징세 청부업자일 뿐이다. 지방행정도 부패하였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샌즈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집문당, 2019, p 127-128)

 

1900년의 대한제국 시절에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처럼 부패가 만연하였다. 190012월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청나라 공사 서수붕은 고종의 매관매직을 비웃었다.

 

서수붕이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고종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본국은 벼슬을 팔아 먹은지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 조선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나 되었는데도 제위(帝位)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고종은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

슬프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282 )

 

그랬다. 대한제국은 탄생 13년 만인 1910년에 망했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