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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역사이야기] 을미사변의 진상

[역사이야기] 을미사변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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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경복궁 곤녕합에서 시해된 것이다. 이는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극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을미왜변’으로 불렀다.

 

을미사변은 은밀히 진행된 데다가 일본이 사건을 철저히 인멸해 그 진상이 제대로 안 밝혀지고 있다.

그 진상을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고종실록도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간행돼 한계가 있다).

8월 19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안경수가 일본인 장교가 훈련시키고 있는 훈련대 970명을 해산한다는 밀지(密旨)를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가서 미리 알렸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만나 분노를 터뜨렸다. 미우라는 우범선에게 다음날 훈련대와 함께 항의하도록 권유했다. (한편 1919년 3월 4일의 ‘순종실록 부록’의 고종 황제 행장에는 ‘을미년(1895) 8월. 적신(賊臣) 우범선 등이 변을 일으켜 중궁전이 승하했다’고 적혀 있다.)

8월 19일 밤 궁궐에서는 사면된 민씨 척족 실세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밤늦도록 열렸다. 왕후는 고종과 함께 달 놀이까지 즐겼다.

8월 20일에 일본은 작전명 여우사냥을 시행했다. 새벽 1시경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 30명은 공덕리에 가서 3시경에야 대원군을 강제로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고종실록과 1896년 1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판결문에는 이주회가 오카모토와 동행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주회는 동행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연, 기쿠지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서해문집, 2015, p44)

대원군 일행은 4시 반 경에 서대문에 이르렀고, 5시 반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살해당했다. 광화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각각 100여명의 일본군이 추성문, 춘생문을 통과해 궁궐을 공격했다. 이에 궁궐시위대 미국인 교관 다이의 지휘하에 300~400명의 시위대가 저항했으나 곧 무너졌다. 다이와 러시아인 사바틴은 서양인 숙소로 몸을 숨겼고, 시위대는 도망쳤다.

이후 일본군 수비대 600여명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했다. 일본 낭인 수십명과 군인들은 곧바로 건청궁으로 돌진해 왕과 세자의 측근을 붙잡았고, 일부는 왕후의 침실인 곤녕합으로 향했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왕후를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는데 이것이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단서가 됐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붙잡혀 쓰러졌다. 낭인은 왕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여러 번 칼로 찔렀다. 낭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살해하고 있었는데, 그때 의녀가 앞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덮어줬다. 이내 왕후와 궁녀 몇 명의 시신은 녹원에서 불태워졌다. 시간은 6시경이었다.

그런데 민왕후의 시신 ‘능욕설’이 논란이다. 내각 고문관으로 근무한 이시즈카 에조가 일본 법제국장에게 8월 21일에 보낸 보고서 때문이다. 여기에는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태워 버리는 등…”이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시즈카는 을미사변의 가담자가 아니었고, 검증되지 않은 유언비어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연, 위 책, p 72-73) 그럼에도 학계는 진위가 양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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