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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민씨 척족의 부패 1-2회

고종 시대를 읽다 (1)

- 민씨 척족의 몰락과 친일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894623일에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해군은 아산만 부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기습하여 격침시켰다.

 

이보다 이틀 전인 621일 새벽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22일에는 김홍집 친일 내각이 들어섰고 대원군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이러자 민영준 · 민형식 · 민응식 등 민씨 척족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원세개에게 청군 파병을 요청했던 병조판서 민영준은 평안도로 도망갔다가, 평양전투에서 패주한 청군을 따라 청나라로 도피했다.

 

민응식은 삿갓을 쓰고 교군꾼처럼 꾸미고 숭례문을 나서자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비웃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중전을 충주 장호원에 있는 자기 집에 피신시켜 벼락출세하여 이조판서 · 병조판서를 하였다.

 

622일에 고종은 민영준, 민형식, 민응식 등에게 유배를 명했다.

"좌찬성 민영준은 오로지 취렴(聚斂)을 일삼아 자신을 살찌우는 것으로 원망을 샀고, () 삼도수군통제사 민형식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못하는 짓이 없어 그 여독이 이웃 경내까지 두루 미쳤으며, 전 총제사(總製使) 민응식은 군영을 창설하면서 고친 것이 많고 세금을 거두며 물의를 일으켰으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고종실록 1894622)

 

민영준(18521935)188712월부터 188911월까지 2년간 평안감사를 하면서 온갖 수탈을 하여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바쳤다.

 

민형식(閔炯植 18591931)1891년에 삼도수군통제사였는데, 빈부를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재산을빼앗았다. 처음에는 영남에 그쳤으나 스스로 삼도를 관할한다 하여 호남과 호서(충청도)에 까지 미쳤다. 무릇 바닷가 가운데 배 닿을만한 곳이 먼저 수탈을 당하였다. 그는 거부(巨富)에게는 5-6만 냥, 그 다음은 3-4만 냥, 또 그 다음은 1-2만 냥을 뜯어냈으며, 통영의 수군통제영 감옥에 한 번 들어가면 곧 파산하였다. 사람들은 민형식을 미친 도둑놈이라 불렀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306-307)

 

18941227일의 고종실록에 의하면 임형식이 약탈한 돈은 721,277냥이었는데, 이는 1895년 당시 국가 세입 480만 냥의 15%였다.

 

탁지부(度支部)에서 건양(建陽) 원년도(元年度) 총예산을 세입 4809,410(), 세출 6316,831원으로 결산했는데, 세입 부족액 1507,421원을 국채(國債)나 기타 방법으로 보충할 사안을 내각 토의를 거쳐서 상주(上奏)하였다.”(고종실록 18951115)

 

625일에 고종은 민영준을 영광군 임자도, 민형식을 흥양현(고흥군) 녹도, 민응식은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 보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도망쳐 숨어버려 깨어 있는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였다.

 

이후 1년 뒤인 189573일에 고종은 민영준, 민형식, 조병갑, 민응식 등 261명을 풀어주었다. 참으로 너그러운 임금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풀어주고 민영준과 민형식 같은 탐학한 관리들을 261명이나 사면하다니.

 

사면령이 내린 지 45일이 지난 819일 밤에 경복궁에서 민왕후(1851~1895)궁내부 대신으로 내정된 민영준에 대한 축하연회를 열었다. 민영준이 내정 통보를 받고 청나라에서 급거 귀국한 것이다. (안승일 지음, 김홍집과 그 시대, 2016, p 248)

 

그런데 다음 날인 820 새벽 5시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경복궁에 잠입한 일본 낭인들이 민왕후를 건청궁 곤녕합에서 살해한 것이다.

 

1015일에 고종은 민왕후의 승하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민영준(閔泳駿)을 산릉 제거(山陵提擧)에 임용하였다.

 

어어서 민영준은 1896년에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되었고, 1901년에는 민영휘(閔泳徽)로 개명하여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용되었다. 민응식은 18978월에 중추원 의관에 임용되었는데, 1903년에 별세하였다.

한편 육군부장 민형식은 19071월에 찬모관(贊謀官)에 임용되었다.

 

이렇게 권세를 누린 민영휘와 민형식은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하자 친일파로 변신했다. 민영휘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 원을 받았고, 민형식도 남작 작위와 25천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그런데 민씨척족 중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민영휘, 민형식 외에도 여러 명이다. 민병석과 아들 민홍기, 민영규, 민영기, 민영소와 아들 민충식, 민영찬, 민종묵과 아들 민철훈 등이고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은 작위를 물려 받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2009)

 

 

 

고종 시대를 읽다. (2)

- 민씨 척족의 세 도둑들

 

 

189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울에 화적떼가 크게 일어나, 대궐로 진상되는 임금의 물건까지 도난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자 고종은 좌우 포도대장 한규설과 이종건을 파직시키고, 신정희를 좌포도대장에 임명하였다. 이러자 한 달 사이에 도둑들이 겁을 먹고 조용해졌다.

하지만 신정희는 중전의 비호를 받고 있는 무당 진령군만은 잡아다가 처벌하지 못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안타깝다! 신정희는 명종 때 변협이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 보우를 처단한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 무렵에 백성들은 여흥민씨(驪興閔氏)들 가운데 세 도둑을 입에 오르내렸다. 즉 서울의 도둑 민영주, 강원도 민두호, 그리고 경상도 민형식(閔炯植)이었다.

 

민두호는 정권 실세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의 아비이고, 민영주는 민영준과 종형지간이며, 민형식은 민영위의 서자였다.

 

민영주(1846미상)는 유생 시절부터 서울의 부자들과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인 한강 · 서강 · 마포나루 등의 거상(巨商)의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는 법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주리를 틀고 거꾸로 매다는 등 온갖 악형을 가해 날마다 돈을 긁어모았으며, 일상생활은 거의 임금수준의 호사생활이었다. 민영주는 189212월에 이조참의를 지냈고 18935월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했는데, 흉악하기가 이전과 같아서 사람들은 그를 민 망나니라고 불렀다. 망나니는 칼춤을 추는 사형 집행수의 속된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하고 천한 이를 표현하는 말이다.

 

민두호는 1887년부터 춘천부사를 했는데, 춘천을 유수(留守)로 승격하여 임금이 머물 숙소인 행궁을 짓자, 실세 민영준이 아비 민두호를 그대로 유수 자리에 앉혔다. 그리하여 민두호는 1892년부터 18935월까지 춘천부 유수로 근무하다가 잠시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하였다, 그는 다시 189312월부터 춘천부 유수를 하였다.

 

그런데 민두호는 어리석고 천박할 뿐만 아니라 흉악하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민두호가 유수로 부임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백성들은 민두호를 민 쇠갈고리라 불렀다.

 

민형식은 189112월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는데 나이 33세였다. 그는 통제사로 부임한 1년 사이에 삼도의 부자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고 재산을 갈취했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惡鬼) 또는 미친 호랑이(狂虎)’라고 불렀을까? 이런 말들은 그가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정도로 포악하다는 뜻이었다. 특히 민형식은 당시 국가 세입 480만 냥의 15%에 해당하는 70만 냥을 치부했으니 세 도둑 중에 가장 큰 도둑이었다.

 

이 당시에 중전 민씨의 비호를 받은 민씨 척족들은 하나같이 탐학하였다. 팔도의 큰 고을은 대체로 민씨 척족들이 수령을 차지하였으며, 평안 감사나 통제사는 10여 년 넘게 여흥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는 민씨 척족을 원망하는 소리로 뒤덮였고 아이들 노래나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온통 난리가 왜 일어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18946월 하순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의 친일정권과 대원군이 전면에 나서자, 서울의 도둑놈 민영주는 양주로, 춘천 유수 민두호는 진령군과 함께 충주로 도망갔다. 오직 도망가지 않은 자는 민영환과 민영소였다. (역주 매천야록 상, p 371-372)

 

1895318일에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은 민영주를 처단하도록 아뢰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동지중추원사 민영주는 본래 무뢰배로서 불량배와 결탁하여 경성(京城)과 지방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죄악이 오래 쌓이고 원한이 세상에 넘쳐나니, 이는 나라의 횡포를 부리는 원흉입니다. 법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으니,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잡아다 가두고 징계하여 처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18954월 러시아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이 강함을 안 고종과 중전은 친일파를 멀리하고 민씨 척족들에 대한 대사면을 단행했다. 73일에 민영준, 민영주, 민형식, 조병갑, 민응식 외 260명을 사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