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부패한 고종과 명성황후
-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 승인 2020.11.26 18:37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873년 11월, 10년간의 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하자 이번에는 중전 민씨(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의 척족들이 판쳤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적었다.
고종과 중전은 돈을 물 쓰듯 썼다. 대원군이 십년간 모은 국고를 일년만에 탕진한 것이다.
“원자(나중에 순종)가 1874년 2월에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됐다고 따지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십년간 모은 것을 일년도 안 돼 모두 탕진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科擧)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50, 54)
고종과 중전이 직접 나서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팔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실제로 중전 민씨는 1875년경부터 지방 수령 자리를 돈 받고 팔았다.
“중전은 공을 들이고 비는 일에 절제가 없고 물품의 하사도 적지 않아 돈이 한량없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에게 전국의 수령 자리의 값을 매겨 올리도록 했다. 민규호는 지방 수령의 관직은 팔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응모자가 없도록 하려고 1만냥짜리 자리를 2만냥으로 올려서 중전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이 가격에도 수령을 하려는 지원자가 엄청 많았다. 그리하여 부임하는 수령들은 가렴주구를 일삼아 백성들이 더욱 곤궁해졌다. 그때야 민규호는 후회했다.” (황현 지음·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상), 2005, p96)
더구나 1875년 8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된 민규호는 고종에게 ‘벼슬 시킬 사람을 붉은 종이에 써서 이조에 내려주면 추천자 명단에 올리겠다’고 은밀히 아뢰었다. 고종은 이 방법이 마음에 들어 중전과 의논해 벼슬 시킬 사람을 서하(書下)했다. 이는 조선왕조가 실시해 온 의망(擬望 : 이조가 3명의 후보를 올리면 임금이 낙점) 제도를 무너뜨린 낙하산 인사였다.
한편 왕실은 과거를 팔고, 참봉·감역 등 초임(종9품) 벼슬도 팔았다. 심지어 충청도의 늙은 과부가 데리고 사는 ‘복구(福狗)라는 개’에게 감역(監役 건축 토목공사 감독) 벼슬을 팔려는 해프닝도 생겼다. 이토록 민씨 정권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때보다 훨씬 더 부패했다.
1900년 12월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청나라 공사 서수붕은 고종의 매관매직을 비웃었다.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고종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나 됐는데도 제위(帝位)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고종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
“슬프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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