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궁전광장
1712년에 러시아 표트르 대제(1672~1725)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예술의 도시이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있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란 시로 유명한 푸시킨(1799~1837)이 결투하다가 죽은 곳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소설 『죄와 벌』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 1 표트르 대제 기마상
2018년 4월 하순에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관람했다.
관광버스는 궁전광장 앞에 섰다. 궁전광장 왼편에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있고 오른편은 구(舊) 해군 참모본부이다. 구 해군 참모본부 중앙에는 개선 아치가 있는데, 그 위에는 마차를 모는 승리의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진 2 궁전 광장의 개선 아치
궁전광장 중앙에는 높이 47.5m, 직경 4m, 무게 600t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기둥이 있다. 이 기둥이 바로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인데 러시아가 1812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34년에 세워졌다. 기둥 꼭대기에는 알렉산드르 1세 (재위 1801~1825)의 얼굴을 한 천사가 십자가를 붙잡고 뱀을 누르고 서 있다. 천사는 알렉산드르 1세이고, 뱀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사진 3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
그런데 궁전광장은 러시아 역사 현장이다.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그리고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아침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조용히 길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할 생각으로 궁전을 향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가폰(1870~1906)이 있었다.
1903년 봄에 가폰은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들었다. 모임의 주된 내용은 친교와 명사 강연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000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04년 12월말에 1만2000명의 노동자를 가진 최대 금속기계 회사인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폰의 클럽회원 4명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노동자들은 연일 집회를 열어 해고자 복직을 요구했고, 1905년 1월에는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확대되어 450여 공장 11만 명이 동조파업을 했다. 이럼에도 사업주들은 완강했고 노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1월22일에 가폰은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나섰다. 청원서에는 해고자 복직 요구를 사업주가 거절했다는 내용과 함께 8시간 노동제, 노동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후 2시에 궁전광장에는 20만 명이 넘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1,000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죽었고, 4000 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잔혹한 학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노동자들이 항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1월 한 달 동안 동맹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44만 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지난 10년 동안에 파업 참가자수 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국민들은 차르는 노동자 편이 아니며 지주 및 자본가들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르는 물러가라. 공화국 만세.“
이런 구호는 전국 도처에 퍼졌으며 집회와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만주로 진입하여 9월에는 랴오양을 점령하였고, 여순도 위협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15일에 니콜라이 2세는 발틱 함대를 라트비아 리예파야의 발틱 항구에서 출발시켰다.
하지만 발틱함대는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220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해군은 1905년 5월27일에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무참하게 궤멸시켰다.
9월5일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중재 아래 러·일간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11월17일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고, 1910년 8월29일에 조선을 강제병탄했다.
한편 1917년 10월 25일, 네바강에 정박 중인 순양함 오로라호에서 한 발의 공포탄이 울렸다. 이를 신호탄으로 공산혁명 지도자 레닌(1870∽1924)은 겨울 궁전을 습격하여 임시정부 카렌스키를 몰아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정권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예르미타시 박물관
예르미타시 박물관 본관은 러시아 황제가 지낸 겨울궁전이다. 에메랄드 색의 화려한 건물은 1762년부터 1904년까지 러시아 황제들이 거주한 공간이다.
‘예르미타시(The Hermitage)’란 이름은 프랑스어로 ‘은둔지(place of solitude)’란 의미인데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에카테리나 2세(1729~1796, 재위 1762~1796)이다.
사진 4 예르미타시 박물관 전경
매우 흥미로운 점은 예카테리나 2세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 표트르 3세를 186일 만에 폐위시킨 여제(女帝)란 점이다.
표트르 3세(1728~1762, 재위 1761~1762)는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인데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서 살면서 1745년에 엘리자베타 여제(1709~1761, 재위 1741~1761)가 간택한 프로이센 한 지역의 공주 소피아(나중에 예카테리나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표트르는 아내와 관심이 없었고 공개적으로 외도했다. 또 아내를 모욕주고 폭력도 휘둘렀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후손 없이 1761년 12월25일에 죽자 표트르 3세가 황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7년간의 전쟁 끝에 프러시아를 거의 멸망시켜 1760년 9월에 베를린에 입성하고 1761년에는 콜베르 요새를 점령하여 프러시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표트르 3세는 황제가 되자마자 프러시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지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표드르 3세의 반 국익적 행위로 인해 군인과 귀족들은 큰 불만을 가졌다. 이어서 표트르 3세가 모든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해버렸고, 성직자들에게 수염을 깎고 루터교의 목사처럼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자, 성직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이러자 예카테리나는 케남편과 달리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여 국민들의 환심을 샀고 궁정 귀족들과 친위대 장교들의 존경을 받았다.
1762년 6월28일 아침에 장교복장을 한 예카테리나는 말을 타고 친위대 병영에 도착하여 표트르 3세의 반 러시아적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궁정혁명이었다. 이에 친위대는 에카테리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표트르 3세를 체포하여 구금했다. 이후 표트르 3세는 구금 상태에서 1주일 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문명식 편역, 러시아 역사, 294-295)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역사도 예카테리나 2세의 개인 컬렉션에서부터 시작된다. 1764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베를린 상인 고츠콥스키의 부채를 탕감해주면서 그 대신 225점의 그림을 받았다. 이 그림들에는 루벤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그녀는 1769년에 티치아노 등의 그림 600점, 1772년에는 라파엘 푸생 등의 그림을 더 구입하여 컬렉션이 더욱 풍성해졌다.
그녀는 은둔의 방에서 극히 한정된 사람과 은밀하게 환담하면서 소장품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림을 전시할 공간이 부족하자 1771~1778년에 궁전 건물을 추가로 지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속 그림을 사 모아 그녀가 죽을 당시에는 3996점이나 되었다.
한편, 에르미타시 박물관은 1852년에야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이곳은 고대 이집트와 스키타이 황금 유물, 그리스-로마의 조각,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은 물론 고흐, 마티스, 피카소, 루벤스, 렘브란트, 로댕 등 유명 화가 · 조각가들의 그림과 조각 작품들이 270만 점이나 있다.
이 작품들을 1분씩만 보아도 5년이 걸린단다. 박물관을 모두 둘러보려면 27㎞를 걸어야 한다니 두 시간 정도의 관람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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