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54) 26일 만에 쓴 소설 『도박꾼』
승인 2020-08-17 17:23:27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66년 1월부터 12월까지 '러시아 통보'에 연재한 '죄와 벌'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평론가들 사이에도 거센 찬반론이 일어났다.
혹자는 작가의 천재적인 심리적 통찰력과 철학의 깊이를 말했고, 혹자는 그가 젊은 세대를 헐뜯고 있다고 하면서 오로지 고통스럽고 병적이며 왜곡되고 혐오스러운 것들에만 몰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출스끼 지음,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p 154)
한편 도스토예프스키는 1866년 9월까지도 '죄와 벌' 집필에 몰입한 나머지 11월 1일까지 출판업자 스텔로프스끼에게 납품해야 할 장편소설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형 미하일이 죽은 후 남긴 빚 때문에 1865년 여름 내내 채권자에게 시달렸다. 채권자는 빚을 안 갚으면 감옥에 넣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그는 출판업자 스텔로프스끼에게 선인세로 3000 루블을 받으면서 불리한 계약을 감수했다. 계약서에는 1866년 11월 1일까지 새 장편소설을 납품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12월1일까지도 불이행하면 전 작품에 대한 판권을 인세없이 출판사가 갖는다는 불공정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3000 루블을 받아 급한 빚을 청산했다.
납품기한이 다가오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친구들이 안달이 났다. 친구들은 각자 분담하여 한 챕터(Chapter)씩 써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주면 그가 수정 보완을 하도록 제안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러자 친구들은 속기사 고용을 제안했고 그도 동의했다.
10월 4일 오전 11시 반,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양이 도스토예프스키 집의 벨을 눌렀다. 이후 두 사람은 매일 작업을 했다. 그가 소설을 구술하면 속기사가 받아 적고, 정서된 소설을 다음 날 가져오는 식이었다. 작업은 26일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10월29일에 장편 소설 한 편이 완성되었다. 집필 과정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던지 1980년에 '도스토예프스키 인생의 26일'이란 제목의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사진=김세곤 제공
소설 제목은 '도박꾼 (또는 노름꾼)'이다. 이는 도박 중독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체험이었다. 그의 도박은 1863년 8월 애인 수슬로바를 만나러 파리로 가는 길에 들른 독일 비스바덴의 카지노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 그는 1만 프랑이 넘은 돈을 땄다. 이 맛에 빠져서 그는 계속 도박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인생의 26일 포스터. 사진=김세곤 제공
그가 1865년 7월에 해외로 도주했을 때도 비스바덴에서 도박을 하여 닷새 만에 가진 돈을 모두 날렸고,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호텔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완전히 묶여 지내야 했다. 이런 즈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구상했고, '러시아 통보' 잡지의 발행인 미하일 카트코프에게 편지를 보내 300루블을 선불로 받고 1865년 11월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면 소설 '도박꾼'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소설의 배경은 라인강변에 위치한 가상도시 룰레텐부르크이다. 모 장군의 가정교사 알렉세이는 양녀 폴리나를 죽도록 사랑한다. 하지만 경쟁자인 영국인 사업가와 프랑스인 후작에 비하면 그는 돈도 신분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장군에게는 모스크바에 사는 부자 친척 아주머니가 있다. 노환으로 다 죽어가는 아주머니의 재산을 상속받으면 장군은 빚도 갚을 수 있고, 고급 매춘부 블량슈와도 결혼할 수 있다. 그는 애타게 아주머니의 사망 소식을 기다린다.
그러던 차에 장군의 부자 친척 할머니가 하인들을 거느리고 룰레텐부르크에 온다. 그녀는 곧장 알렉세이를 데리고 도박장에 가서 룰렛 도박을 한다. 그런데 노파는 하루 만에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영국인에게 돈을 빌려 귀국한다.
이때 알렉세이도 도박을 한다. 그는 신들리듯 베팅을 하여 몇 시간 만에 20만 프랑을 딴다.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카지노가 발칵 뒤집혔다. 호텔 방에 돌아온 그는 폴리나에게 5만 프랑을 준다. 날이 밝자 그녀는 알렉세이에게 5만 프랑을 던지고 사라진다. 이윽고 고급 매춘부 블량슈가 알렉세이에게 접근한다. 알렉세이는 블량슈와 파리에 가서 3주 만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도박꾼으로 전락한다. (석영중 지음, 매핑 도스토옙스키, 열린 책들, 2019, p 218- 234)
도박과 사랑이 테마인 이 소설은 ‘자본주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돈이면 모든 것이 되는 ‘돈 광풍’을 보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도박'』은 워낙 흥미진진하다 보니 지금도 연극, 오페라,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
'도박꾼' 영화 포스터 (1997년 헝가리 영화)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아내와 세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인도 여행 (2) - 타지마할 김세곤 (0) | 2020.08.25 |
---|---|
타지마할 = 인도 아그라 (0) | 2020.08.20 |
북인도 여행 (1) - 델리의 쿠틉 미나르 유적군 =김세곤 (0) | 2020.08.12 |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53) 죄와 벌 – 에필로그 (0) | 2020.08.10 |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9)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중살인(2) (0) | 2020.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