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년 (연산군 1년) 6월 29일에 홍문관 직제학 표연말 · 전한 김수동 ·
부응교 홍한 · 부교리 권오복과 성희안 · 저작 송흠 · 정자 권민수와 성중엄 등은 연산군에게 네 번째로 아뢰었다.
"비록 한 명의 언관(言官)에게 죄를 내릴지라도 오히려 듣기에 놀라운데, 대간
전원이 옥에 갇혀 있으니, 어느 누가 놀래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직언(直言)을 듣기 싫어 한다는 이름만 얻게 될 뿐입니다. 이 혹심한
더위에 비록 죄가 있어 옥에 갇힌 자라도 오히려 조심성 있게 다루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인데, 하물며 죄 없는 대간을 옥에 갇혀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연산군은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고
전교했다.
홍문관 관원들은 5번째로 아뢰었다.
"대저 신하가 옳습니다만 하고 고분 고분하는 것은 충성이 아닌데, 대간에 있어서는
더욱 충성이 아닙니다. 대간이 속으로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 겉으로만 전지(傳旨)에 복종하면 되겠습니까. 전지를 받들지 않은 것은 곧 그 직책을
다하자는 것이니, 무슨 죄가 있습니까. "
이러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그대들의 말이 옳으나, 굳이 거역하고 받지
않는 것도 어찌 죄가 없다 하겠느냐.”
표연말, 송흠 등은 다시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역시 듣지 않았다.
홍문관 관원들은 7번째로 아뢰었다.
"윤탕로를 탄핵하고 있기 때문에 전지를 받들지 않은 것이 무엇이 다르리까. 근래에는
경연관(經筵官)이 아뢴 것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실망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은 "추국한 뒤에 죄는 짐작해서
처리하겠다."고 전교하였다.
이러자 표연말 · 송흠 등은 8번째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학문은 경(經)과 사(史)를 널리 열람하여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성종의 일을 들어서 아뢴 것은 전하께서 듣고 보신 바이므로 선왕을 잘 계승하시게 하려는 것인데, 전하께서 는 우리 성종도 본받지
않으시니, 선왕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은 소망에 결여됨을 이길 길 없습니다."
연산군은 "사헌부에서 전지를 받지 않았으니, 당연히 국문해야 하고, 간원(諫員)은
석방하라." 하였다.
이러자 홍문관은 다시 아뢰었다. 이 날 들어 9번째이다.
"전하께서 이미 사간원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아시고 석방하시니, 이는 미덕입니다.
사헌부 역시 다른 사정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한 번 전지(傳旨)를 받게 되면 뒤에는 아뢰기 어렵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뿐입니다. 청컨대 사헌부도
아울러 석방하시면 더욱 성덕(盛德)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0번째로 다시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치고 허물없는 분은 적습니다만, 그 허물을 능히 고치면 이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대간을 아울러 파직시킨 때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대간을 국문하라는 명령은 아무래도 지나친 조치이니,
‘국문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면, 성덕에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
그러자 연산군은 전교하였다.
"성종의 일은 무엇인들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랴. 다만 근래에 대간이 말을 하면
기어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산이니 반드시 국문해야 한다."
홍문관은 또 아뢰었다. 11번째이다.
"임금의 위세는 뇌전만균(雷電萬鈞)과 같사온데, 신하가 뇌전만균 같은 위엄을 무릅쓰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과감히 간언하는 것은 어찌 권세를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그러겠습니까. 이는 공론과 법을 실현시키려는 것이요, 임금에게
반드시 이기자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공론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의 몸에 원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 원기가 두루
통한 뒤라야 몸에 질병이 없고, 공론이 행한 뒤라야 국가가 평안합니다. 원컨대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연산군은 "그대들의 말이 옳다. 국문한 뒤에 짐작하겠다."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29일 3번째 기사)
이어서 6월30일에는 표연말 등 홍문관 관원들은 사헌부가 죄 없으니 추국명령을
거두라고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30일 1번째 기사)
대신 신승선도 대간을 가둔 것은 잘못이라고 아뢰었고, 대사헌 최응현· 대사간 이감
등이 같은 사연으로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명령을 거역한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대사헌과 대사간이 "대간이 윤탕로를 논하는 것은 공론입니다.
청컨대 국문을 마소서." 라고 다시 아뢰자 그 때야 연산군은 석방하라고 전교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6월30일 2번째
기사)
7월1일 이후에도 사헌부와 사간원은 합사하여 윤탕로를 국문하라고 아뢰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1495년7월1일, 7월6일) 삼사는 윤탕로의 직첩을 박탈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이에 밀린 연산군은
윤탕로의 직첩을 거두고 경기도로 귀양 보냈다.(연산군일기 1495년 7월21일)
이렇듯 대간들의 간언은 끈질겼고 임금의 비호를 받은 외척 중 비리
관리는 가만 두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