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슬픈 이야기 한 줄 없는 ‘이별 다리’
¶글쓴이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노산군 부인에게 호령
-명나라황실에 급변사태. 태상황(太上皇) 정통제(正統帝) 복위. 세조, 단종 복위 가능성 두려워해
-평화시장 근처에 전태일 동상도 있고 동판도 수두룩한데, 영도교에는 단종의 슬픈 사연들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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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계천에서 본 영도교의 모습. 단종이 정순왕후 송씨와 영영 헤어진 곳이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1457년 6월22일 관우 사당인 서울 동묘에서 중구 황학동으로 가는 영미교(永尾橋) 다리에서 호송대장 첨지중추원사 어득해는 노산군 부인 송씨에게 호령했다. 휘하의 50여명의 금부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송씨 부인을 가로막았다.
노산군과 송씨 부인은 다리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부인, 부디 자중 자애하시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이것이 영영 이별이었다. 4개월 후인 10월24일에 노산군은 강원도 영월군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했다.
1457년 2월8일에 세조는 명나라 황실에 급변사태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태상황(太上皇) 정통제(正統帝)가 복위한 것이다. 정통제는 1449년에 몽골계 부족장 야센(也先)이 명나라 변방을 침입하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친정했으나 대패하여 야센의 포로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중 황제가 포로로 잡혀간 것은 북송 시대(960∼1127년) 정강의 변으로 잡혀간 송 황제 흠종과 휘종 이후 처음이었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土木의 變)이라고 한다.
이러자 명나라 조정은 정통제의 이복동생 경태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1450년에 정통제는 명나라로 돌아왔지만 태상황이 되어 유폐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은 정통제 파와 경태제 파로 나뉘었다. 1457년 1월에 경태제가 병을 앓자, 정통제 일파는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켰고 한 달 후에 경태제는 급사했다.
6월3일에 세조는 조칙을 갖고 온 명나라 사신을 모화관에서 맞이했다. 명나라 사신은 경복궁에서 복위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세조와 그의 신하들은 극도로 불안했다. 명나라에서 태상황이 복위되었으니 상왕 단종도 복위될 가능성이 있다는 위기감이 돌았다.
정인지·신숙주등 세조의 측근들은 단종을 그냥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계략을 꾸민다. 6월21일에 백성 김정수가 전(前) 예문제학 윤사윤에게 “송현수와 권완이 반역을 도모합니다.”라고 고변하자, 윤사윤은 이 사실을 즉시 세조에게 아뢰었다(세조실록 1457년 6월21일). 송현수는 단종비 송씨의 부친이고, 권완은 단종의 후궁 권씨의 아비이다.
백성 김정수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그런 역모 정보를 얻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6월21일자 실록에 전혀 기록이 없다. 그런데도 세조는 일개 하찮은 백성의 말만 믿고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즉시 하옥시켰다. 이는 날조된 옥사가 분명했다. 곧이어 세조는 금성대군 저택에 유폐된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로 유배 보냈다. 세조는 교지(敎旨)를 통해 “상왕을 유배 안 보내려 했는데 송현수 옥사가 일어나서 종친과 대신들이 유배 보내라니 짐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너무 속보이는 책임 회피였다.
6월22일에 노산군은 유배 길을 떠났다. 그런데 노산군 부인으로 강봉된 정순왕후 송씨(1440∼1521)는 함께 갈 수 없었다. 정순왕후는 1454년에 열다섯 나이로 한 살 아래인 단종과 혼인했다. 결혼 생활 3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1455년 윤6월11일에 수양대군이 혜빈 양씨(단종을 키운 세종의 후궁)와 금성대군을 제거하자, 겁에 질린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했다. 1456년 6월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일으킨 단종 복위 사건으로 피바람이 불었고, 이제는 부친 송현수마저 조작된 역모에 걸려들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송씨는 눈물을 삼키면서 단종과 이별해야 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불렀다. 문자깨나 좋아하는 이들은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 하여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다.
영도교는 서울 청계천 7가에서 8가 사이에 있다. 하지만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한 슬픈 이야기는 다리 어디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 청계천 6가 평화시장 근처의 전태일 다리는 전태일 동상도 세워져 있고 전태일을 기리는 동판이 길 바닥에 수두룩한데, 영도교에는 단종의 슬픈 사연이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다. 스토리가 관광자원인데 이를 방치한 서울특별시의 처사가 못내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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