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1)
¶글쓴이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일본 다녀온 통신사 중 황윤길은 “병화(兵禍)가 있을 것” 김성일은 “인심 동요시키지 말라”
-김성일 “성읍 수축도 하지 말라” 이순신 발탁에 대해서도 “좌수사 파격승진은 너무 심하다”
-임란 일어나자 잡혀가던 김성일, 류성룡의 변호로 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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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를 알아보라고 보낸 통신사 일행은 귀국 후 정반대 보고로 결정적으로 전란 대비를 망쳤다.
#1.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
1592년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대비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다.
1591년 3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알현했다. 정사(正使)는 황윤길, 부사(副使)는 김성일이었다. 이들은 1590년 7월22일에 교토에 도착하여 11월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1591년 1월에 귀국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아뢰었다.
선조가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였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된다”고 일축했다.
선조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김성일은 류성룡에게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이 분분했다. 당시는 동인이 세력을 잡았기에 대세는 김성일에게 기울었고, 동인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공격했다. 마침내 선조는 ‘전쟁이 없다’를 국론(國論)으로 정했다.
불행하게도 1년 뒤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김성일은 ‘전쟁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없다’고 단언하여 ‘부정의 오류(false negative)’를 범했다.
이런 오류는 김성일의 잘못된 일본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깔보았다. 1543년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인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을 하찮게 보았다.
#2. 김성일, 이순신의 발탁이 잘못되었다고 상소하다
1591년 11월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1538∼1593) 등이 상소하였다. 상소의 요지는 축성을 중지시키고,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11월1일)
먼저 축성부터 살펴보자. 1591년 7월에 선조는 호남과 영남의 성읍을 수축하였다. 비변사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자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했다.
축성은 경상감사 김수가 제일 열심히 했다. 그러나 태평세월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백성들은 안일에 젖어 노역을 꺼리고 원성들이 높았다. 김성일은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는 김성일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상당수 관리들이 김성일과 같은 의견이었다.
이러자 김수는 ‘성을 쌓는 역사에 대해 도내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갈등만 낳았다. 이토록 왜침 대비는 속도와 힘을 잃은 채 조선은 1592년 봄을 맞았다.
둘째, 김성일은 이순신의 발탁은 잘못된 인사라고 상소했다. 1591년 2월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였다. 종6품에서 정3품으로 7계단 뛰어넘은 파격 승진이었다. 그런데 사흘 뒤인 2월16일에 사간원은 이순신의 파격 승진을 문제 삼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관직을 뛰어 넘어 제수하시니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너무 심합니다. 체차시키소서.”
선조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하였다.
“이순신의 일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지 말라.”
2월18일에도 사간원은 어떻게 현령을 좌수사에 승진시킬 수 있느냐며 체차를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근무한 지 9개월이 지난 1591년 11월에 김성일이 상소를 올려 이순신의 인사를 다시 문제 삼은 것이다.
#3. 선조, 김성일을 잡아들이다
김성일의 상소를 읽은 선조는 매우 불쾌했다. 1592년 3월3일에 선조는 김성일을 경상우병사로 임명했다.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즉시 김성일을 잡아들였다. 서울로 압송되던 중에 류성룡의 변호로 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했다. 이후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김성일은 10월의 1차 진주성 싸움을 막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나 1593년 4월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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