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3.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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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 이야기를 계속하자. 기축옥사는 서인에겐 기회였고, 동인은 위기였다. 1589년 12월 14일에 광주향교 유생 정암수 등 50명은 연명으로 이산해 · 정언신 · 정개청 · 나사침 · 유성룡 · 조대중 등 30여명이 정여립과 관련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1524∼1590)도 이 명단에 들어 있었다.
상소를 읽은 선조는 크게 노했고, 이산해·유성룡 등을 만나서 위로하고 정암수 등 10명을 하옥시켰다.(선조수정실록 1589년12월 1일) 하지만 삼사와 성균관 유생들이 적극 신원하여 정암수 등은 곧 풀려나왔다.
그런데 1590년에 들어서 선조는 정여립 사건을 조사하라는 어명을 내려 옥사가 확대되었다. 윤의중은 이발의 외삼촌이라는 이유로 벼슬에서 삭직되었고1), 전라도 도사 조대중(1549∼1590)은 부안에서 데려온 관기를 돌려보내며 눈물을 훔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정여립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방에 들어와 울고 음식도 먹지 않았다.’라는 고발이 들어가 3월에 장살(杖殺)되었다. 2)
정개청(1529∼1590)도 끌려왔다. 정암수의 상소에서 ‘정여립과 글을 주고받고 일찍이 절의를 배척하는 글을 지었다’고 지목한 정개청이 무사할 리 없었다. 조사 처음에는 아무 일이 없는 듯했지만, 나주 유생 홍천경 등이 정개청이 제자 조봉서와 함께 정여립의 전주 집터를 잡아 주었다고 고발하자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정개청은 ‘아직 모반하지 않은 정여립이고, 여립은 이미 모반한 개청’이라는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유배를 갔다가 6월에 함경도 아산보로 옮겨졌는데, 7월 27일에 죽었다. 실로 참담하고 억울한 죽음이었다. 3)
탄핵을 받은 나사침은 일찍이 효행이 있어 방면되었지만, 나덕명· 덕준 등 아들 5형제는 모두 함경도의 경성 · 회령 · 부령 등지로 유배를 갔다. 4)
백호 임제(1549∼1587) 집안도 화를 입었다. 임제가 정여립을 만나 ‘항우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을 못한 것이 애석하다고 하며 서로 눈물을 흘렸다’는 모함을 받았다. 그러나 임제는 이미 2년 전에 별세한 터라 아들들이 대신 형벌을 받았다. 5)
이발이 누구보다 따랐던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인 최영경(1529∼1590)도 하옥되었다. 창평 출신 양천경(양천회의 형)이 정여립을 두령으로 삼았다는 길삼봉이 바로 최영경이라고 상소한 것이다.(선조수정실록 1590년 6월1일) 최영경은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1천명의 선비들이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축옥사는 희생자만 1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4대 사화 희생자를 다 합해도 5백 명 정도인데 비해 엄청난 것이었다. 6)
그런데 달이 차면 기운다 했던가. 1591년 2월에 세자 책봉을 둘러싼 건저의 사건이 터졌다. 2월에 서인 정철은 동인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청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샀다. 선조는 3월 14일에 정철을 파직시키고 7월에는 윤두수 등 서인들을 무더기로 몰아냈다. 7월 20일에 정철은 함경도 강계로 유배당했다. 최영경 등을 무고한 양천경 · 양천회 형제는 8월 13일에 무고죄로 잡혀와 국문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선조실록 1591년 8월13일) 7)
한편, 동인 사이에는 정철의 처리에 대하여 의견이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강경파의 북인(이산해, 정인홍 등 조식 제자)과 온건파(유성룡 등 이황 제자)의 남인으로 나누어졌다. 이 때 윤선도 집안은 남인에 속했다.
1) 윤의중은 1610년 11월에 복관되었다.
2) 역사문화교육연구소 편, 기축옥사 재조명, 선인, 2010, p 167
3) 이종범 지음, 사림열전 1, 아침이슬, 2006, p 299-305,
공조참의 윤선도는 효종 9년(1658년)에 송준길 등 서인이 정개청의 함평 자산서원을 철폐하자 이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오히려 파직 당했다.
4) 김동수 교수는 ‘기축옥사와 호남사림’ 글에서 나주의 정개청 및 나덕명 · 덕준 등 나씨 일가의 피화는 지방사림간의 향권 다툼에서 연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기축옥사 재조명, 2010, p 36-37)
5) 이종범 지음, 사림열전 1, p 292
6) KBS 역사저널 그날제작팀, 역사저널 그날 3, 민음사, 2015, p 119
KBS 역사 스페셜은 정여립의 난을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로 보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5, 효형출판, 2003년, p54-74)
7) 김덕진 지음, 소쇄원 사람들, 다알미디어, 2007,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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