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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목민심서의 탄생 , 김세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청렴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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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한도시

공식

2016.10.13. 08:043,807 읽음

글. 김세곤(<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 (중략)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굶어죽은 시체가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중략)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 한 것이다.”
-1821년 <목민심서(牧民心書)> ‘자서’에서

목민심서의 탄생
1800년 6월에 개혁군주 정조가 별세하자 정약용(1762~1836)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다. 1803년 가을에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시를 지었다. 낳은 지 사흘 밖에 안 된 남자아이와 상복 벗은 지 오래된 시아버지가 군적(軍籍)에 들어갔고 아전은 군포세를 안냈다는 이유로 소를 빼앗아갔다. 백성은 칼을 뽑아 양경을 스스로 자르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당한다”고 했다. 1809년과 1810년에는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그런데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탐학만 일삼았다. 다산은 <용산리>, <파지리>, <해남리> 3리(三吏) 시를 지어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노했다.
다산은 1808년부터 1817년까지 10년 동안 개혁정책을 구상했다. 그래서 쓴 책이 ‘방례초본’이다. 여기에는 중앙의 관제, 세제, 각종 행정기구 등 일체의 제도와 법규에 대하여 개혁의 대강을 제시한 후 기존제도의 모순, 실제의 사례, 개혁의 필요성 등을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 책을 마무리할 무렵에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 ‘이 책을 누가 볼 것인가. 누가 경세를 펼칠 것인가? 집권세력 노론이 이 책을 보고 개혁을 할까?’ 극도의 회의 속에 다산은 책 이름을 ‘경세유표(經世遺表)’로 바꾸고 글쓰기를 중단했다. 이후 다산은 ‘차라리 한 사람의 선량한 목민관이 자기 고을을 조금이라도 잘 다스린다면 백성들의 시름이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목민관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서 <목민심서)>를 썼다. 1818년 봄에 다산은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그해 여름에 해배되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남양주로 돌아왔다.

이 시대에 보내는 현인의 조언
청렴에 대한 글은 다산이 1812년에 영암군수로 부임한 이종영에게 보낸 편지가 압권이다. 옛날 중국 절강성의 한 현령이 재상 부구옹에게 고을 다스리는 법을 물었다. 답은 ‘청렴할 염(廉)’이었다. 다시 3일간 목욕재개하고 또 물었더니 두 번째 답도 염(廉)이었다. 세 번째 물었는데 또 염(廉)이었다. 부구옹은 “청렴함은 밝음을 낳나니(廉生明) 사람이 그 마음을 숨기지 못 할 것이요, 청렴함은 위엄을 낳나니(廉生威) 백성들이 모두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청렴함은 곧 강직하게 되니(廉則剛) 상관이 감히 가벼이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데 능히 다스리지 못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현령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허리띠에 써서 떠났다.
<목민심서> ‘율기 6조’ 제1조 칙궁(수령의 몸가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요(政要)>에 이르기를 “벼슬살이하는 데에 석 자의 현묘한 비결이 있으니, 첫째는 청(淸)이고, 둘째는 신(愼)이고, 셋째는 근(勤)이다.” 청(淸)은 청렴이다. <목민심서> ‘율기 6조’ 제2조 청심(淸心)에는 “청렴은 수령의 본무(本務)로서 모든 선의 원천이요 모든 덕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을 잘 할 수 있는 자는 없다”하였다. 신(愼)은 삼감이다. 다산의 남양주 생가 서실 이름은 여유당(與猶堂)이다. 여유(與猶)는 노자 <도덕경> 제 15장에 나오는 말이다.
“여[與]여!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유[猶]여!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근(勤)은 부지런함이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유산으로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주었다. ‘근(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때까지 미루지 말며, 갠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9월28일부터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행됐다. 이 법 시행으로 청탁과 접대문화가 확연히 바뀔 것이다. 신고포상금을 노리는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도 성행할 것이다. 다산의 청렴정신을 새기고 신독(愼獨)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