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로와 사관 김일손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 탁영로(濯纓路)란 도로가 있다. 길이는 424m에 불과한 짧은 도로이지만, 이 도로는 무오사화의 희생자인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를 따서 이름 지어졌다.
‘탁영(濯纓)’은 김일손의 호(號)이다. 그러면 ‘탁영’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갓끈을 씻는다.’는 해석만으로는 알 수 없다.
‘탁영’은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屈原 BC 343∼BC 278)이 지은 책 『초사(楚辭)』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 활동을 했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난 그는 상수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굴원에게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자,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가 흐려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술에 깨어 있다가 그만 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라고 답했다.
어부가 이 말을 듣고, ‘물결 흐르는 대로 살지, 어찌 고고하게 살다가 추방을 당하셨소?’라고 굴원에게 다시 묻자, 굴원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상수(湘水) 물가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이 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쓴단 말이오?’했다.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굴원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해 음력 5월5일에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런데 김일손은 ‘세상이 흐림에도 불구하고 갓끈을 씻겠노라’고 호를 ‘탁영’이라 지었다. ‘滄浪之水濁兮이어도 可以濯吾纓하겠노라’고 다짐 한 것이다. 그러나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혹독했다. 도리어 그는 무오사화로 능치처사 당했던 것이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사화이다. 士禍(사화)는 선비가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사초(史草)로 인하여 일어났고 사관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史禍(사화)라고도 불린다.
무오사화는 25년간 재위하고 1494년에 승하한 성종(1457∼1494)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실록청 당상관인 이극돈(1435∼1503)은 사초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행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그가 세조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 비였던 정희왕후 상(喪)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 등이었다.
이극돈은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 궁궐의 비밀스런 일)를 문제 삼고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세조 때의 훈구공신 노사신·윤필상·한치형을 설득하자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1일에 유자광은 윤필상,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과 함께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에게 비사(秘事)를 아뢰었다.
처음에 신수근이 도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들이 ‘외척(신수근은 연산군의 매제이고 중종의 장인이다)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신수근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간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하였다.
잠시 뒤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다. 7월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내로 들려오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편 홍사호와 신극성이 달려간 곳은 경상도 함양이었고 체포된 인물은 김일손이었다. 김일손은 149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청도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병을 앓아 함양에서 요양 중이었다. 김일손은 홍사호가 나타나자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에서 일어났다면 큰 옥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말했다.
7월12일에 연산군이 수문당(修文堂 지금의 창덕궁 희정당) 앞문에 납시니,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신수근과 주서 이희순이 입시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을 친국하였다.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
"전해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 대로 말하라.“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네가 또 덕종(德宗)의 소훈 윤씨(昭訓尹氏) 사실을 썼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들었느냐?"
"이것 역시 허반에게서 들었습니다.“
연산군이 가장 먼저 국문한 것은 증조할아버지인 세조의 부도덕이었다. 김일손이 ‘세조가 덕종(1438∼1457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사초에 적었기 때문이다. 이는 세조가 며느리를 탐냈다고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윤소훈은 의경세자의 후실이었다. 그런데 사초에는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글이었다.
이어서 연산군이 친국하기를
"전번에 상소하여 소릉(昭陵)을 복구하자고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소릉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1418∼1441)의 능이다. 1457년(세조3년) 6월21일에 상왕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6월26일에 세조는 형수인 현덕왕후를 폐서인시키고 소릉을 파헤쳐 관곽을 해변 모래사장에 버렸다.
소릉 복위에 관한 첫 번째 논의는 1478년 4월15일에 생육신 남효온이 처음 제기했다. 이어서 1491년(성종 22)에 김일손은 충청도사로 나갔는데 때 마침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이변‘이 있어 성종이 구언교를 내리자, 김일손은 소릉복위를 주청하였다.
이후 김일손은 1495년 5월28일 충청도 도사 시절에 병폐 26조를 상소하면서 소릉 복위를 다시 주청하였고, 1496년(연산군 2년) 1월30일에 사헌부 헌납으로 있을 때는 대사간 김극뉵과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ㆍ이주 등과 함께 소릉복위를 주청하였다. 1)
연산군은 또 전교하기를,
"네가 또 악가(樂歌)에 대한 일을 썼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느냐?"
"비록 동요(童謠)라 할지라도 옛사람이 또한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이것까지 아울러 실었습니다. 후전곡(後殿曲)은 슬프고 촉박한 소리온데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여, 가동(街童) 항부(巷婦)라도 또한 모두 노래하였습니다. 신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항상 염려하는 터이온데, 급기야 사가(賜暇)를 받아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적에 성종께서 술과 안주를 내려주셨습니다. 신은 그 여물(餘物)을 가지고 배를 띄워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기에 무풍정(茂豊正) 총(摠)을 불렀더니, 총(摠)이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하므로, 신이 총에게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 하고, 그후 사기(史記)를 찬수할 적에 신이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확실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이 되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창덕궁이 바로 후전(後殿)이고, 후전곡은 단종이 창덕궁에서 거처했던 처지를 구슬프게 노래한 것이다.
이윽고 김일손을 친국한 연산군은 윤필상과 유자광등에게 김일손을 국문하게 하였다. 7월12일에 유자광은 사초(史草)를 가지고 축조(逐條)하여 심문하였다. 김일손이 말하기를, "신의 사초에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의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에게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단종1년(1453년) 10월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하지만 김일손은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절개로써 죽은 인물로 사초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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