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0월 2일 기미 4번째기사 1747년 청 건륭(乾隆) 12년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
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진달합니다. 부안(扶安)의 격포(格浦)는 곧 삼남(三南) 해로의 인후이며 심도(沁都)를 막아 지키는 땅입니다.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검영(檢營)을 특별히 설치하고 또 행궁(行宮)을 세웠는데, 곡식을 쌓아 놓고 배를 감추어 두었으니, 이는 먼 훗날을 헤아린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설의 규모가 중간에 여러 번 바뀌어 검영을 이미 파하고 다만 별장(別將)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신이 변산(邊山)에 들어와 바다를 따라 60리를 가면서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고군산(古群山)·위도(蝟島)가 아득한 대양(大洋)의 중간에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데, 양도(兩島)에 대해 바람을 타고 돛을 달면 3, 4일 지나지 않아 배를 댈 수 있습니다. 연미(燕尾)의 아래 격포는 양도와 함께 서로 기각(掎角)이 되고, 산이 항구 깊숙이 둘러져 있어 거센 바람과 심한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조선(漕船)·상박(商舶)은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무서운 파도와 큰 물결에 의해 표탕(漂蕩)되어 가끔 침몰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년 삼로(長年三老)220) 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도·군산(群山)·금모포(黔毛浦) 등 4진이 수영(水營)에 이속(移屬)된 이후로 해마다 수군을 조련할 때 전함(戰艦)이 패몰(敗沒)하거나 방졸(防卒)이 익사하는 일을 더러 요행히 면하지 못합니다. 금년 가을에는 군산에서 조련하러 갔던 병졸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 40명이나 되어 과처(寡妻)·고아(孤兒)가 물가에서 슬피 울부짖었습니다.
신은 비로소 4진은 평소 검영에 소속시켜야지 수영에 소속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심도(沁都)의 응원이 될 뿐만 아니라 또 4진에서 수영에 가려면 바람을 기다렸다가 험지를 건너야 하므로 자칫 열흘이나 보름을 넘기게 되니, 설령 뜻밖의 경보(警報)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기간 내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미처 적을 방어하기도 전에 먼저 풍이(馮夷)221) ·해약(海若)222) 의 노여움을 만나게 될 것이니, 이 때문에 도신·어사가 전후의 소장에서 구제(舊制)를 회복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4진을 검영에 다시 소속시키고, 경진년(庚辰年)223) 의 유제(遺制)를 본받아 검영의 중군(中軍)에게 첨사를 겸임시켜 격포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봄·가을에 순력(巡歷)하여 4진의 전함·방졸(防卒)을 기회(期會)하여 항구의 앞 바다에서 조련하게 하면, 칠산에서 패선되고 익사하는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격포로 다시 해산(海山)의 관방(關防)을 삼으면, 훗날 국가가 위급할 때 반드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이 개량(改量) 때문에 나주(羅州)·영암(靈巖) 간을 왕래할 때 작설(綽楔)이 정리(井里)에서 훤히 서로 바라보이므로, 말을 멈추고 물어 보았더니, 충신의 집이 아니면 효자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손을 방문했는데 지금은 모두 쇠퇴하여 서민(庶民)으로 변하였으며, 고가(故家)의 유풍(流風)·유운(遺韻)은 다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호남은 예로부터 화려한 지방으로 일컬어졌는데, 수십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므로, 고기잡고 농사짓는 즐거움에 편안하지 못하고 헤어져 유랑하여 흩어졌으며, 옛날의 높고 큰 정자는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원유(園囿)의 흥폐(興廢)로써 낙양(洛陽)의 성쇠(盛衰)를 안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정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호남의 쓸쓸함을 슬퍼합니다.
아!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李後白)·박상(朴祥)의 문장과 아망(雅望) · 정충신(鄭忠信)의 공적, 김덕령(金德齡)의 용기, 임형수(林亨秀)·임제(林悌)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는 반드시 충신(忠臣) 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일개 도(道)를 수방(搜訪)한다면 ‘인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간혹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고, 간혹 행의(行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감히 그 사람의 성명을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이이정(李頣正)은 고 수찬 이상형(李尙馨)의 후손이고, 민사하(閔師夏)는 고 사인(舍人) 민덕봉(閔德鳳)의 후손이고, 임대(林薱)는 고 유수 임영(林泳)의 족자(族子)이고, 김회(金烠)는 고 참판 김상옥(金相玉)의 족자이고, 신사철(愼師喆)은 고 부학 신천익(愼天翊)의 후손이고, 최필흥(崔弼興)은 고 평사 최경창(崔慶昌)의 후손이고, 고석(高晳)은 고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고, 안황(安煌)은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이고, 정민하(鄭敏河)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후손입니다. 강진(康津)의 이의경(李毅敬), 영광(靈光)의 이중익(李重益), 무장(茂長)의 이만석(李萬錫), 장성(長城)의 유광현(柳光顯), 영암(靈巖)의 조석침(曹錫琛), 무안(務安)의 김경삼(金景森), 보성(寶城)의 김연년(金延年), 전주(全州)의 이익렬(李益烈)·정사협(鄭斯鋏)은 모두 글이나 읽고 뜻을 강논하며 곤궁한 것을 견디고 안정을 지키면서 혹은 백수(白首)에 이르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견발(甄拔)224) 하여 그를 등용하면 혹 격려하고 권장하여 홍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신(一新)을 지나다가 그 이른바 충렬사(忠烈祠)라는 곳을 두루 방문했습니다. 이복남(李福男) 등 7인의 충신(忠臣)을 여기에서 제사하는 데 의사(義士) 임박(林樸)을 배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신을 향하여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이 순국(殉國)한 절개는 진실로 모두 뛰어나지만, 의사의 죽음은 더욱 기이합니다. 정유년(丁酉年)225) 섬나라 오랑캐 적들이 쳐들어 와서 외딴 성(城)이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병사(兵使) 이공(李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는데 의사가 개연(慨然)히 그를 따르며 말하기를, 「죽으면 같이 죽을 뿐이다.」라고 하고 적진으로 이격(移檄)하며 포위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의롭게 여기고 진(陳)을 열었습니다. 병사와 의사가 갑옷을 입고 취라(吹囉)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겨 천천히 가니,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 가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성이 격파되니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성안의 사민(士民)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병사와 의사는 함께 뜨거운 불길로 들어가 죽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그 성취한 바가 그 같이 뛰어났는데도 조가(朝家)에서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이 유독 임박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그로 하여금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침울함을 억누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세(聖世)의 궐전(闕典)이며 충절(忠節)한 사람을 표양(表揚)하는 바가 아닙니다. 임박은 지위가 낮아서 여러 신하들과 견장(甄奬)의 은전(恩典)을 함께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더욱 슬퍼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빨리 높이 포상하라 명하시어 교훈(敎訓)을 수립하시고 퇴락한 풍속을 치켜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부진(附陳)한 것에서 경의 소장을 머물러 두고서 경을 보고 하교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즉시 올라와서 복명(復命)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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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6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호구-이동(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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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20]장년 삼로(長年三老) : 뱃사공.[註 221]풍이(馮夷) : 수신(水神).[註 222]해약(海若) : 해신(海神).[註 223]경진년(庚辰年) : 1700 숙종 26년.[註 224]견발(甄拔) : 인재를 구별함.[註 225]정유년(丁酉年) : 1597년 선조 30년. ○湖南量田使元景夏上疏, 略曰:
臣於湖南形便, 竊有愚見, 敢此附陳焉。 扶安 格浦, 乃三南海路咽喉, 而沁都捍衛之地。 昔在仁廟朝, 特設檢營, 且建行宮, 峙穀藏船, 寔出於長慮深籌, 而施設規模。 中間屢變, 檢營已罷, 只有別將一人。 臣入邊山, 遵海而行六十里, 周覽形勢, 古群山、蝟島, 雙峙於大洋沙茫之間, 乘風掛帆於兩島, 則未過三四日可泊。 燕尾之下格浦, 與兩島相爲掎角, 山回港深, 可以避盲風怪雨。 漕船、商舶, 未入港口, 爲驚濤巨浪所漂蕩, 往往覆溺, 在於俄頃。 是故, 經七山危險而泊格浦, 則舟人瀝酒相賀其得生。 離格浦而向七山, 則雖長年三老, 莫不憂其死。 自蝟島、群山、黔毛浦等四鎭移屬水營以後, 每歲水操戰艦之敗, 防卒之溺, 未或倖免。 而今年秋群山赴操之卒, 渰死者三四十人, 寡妻、孤兒, 哀號水濱。 臣始知四鎭常屬檢營, 不屬水營。 不但爲沁都之應援, 且自四鎭往水營, 則候風涉險, 動經旬望, 設有意外警報, 其何能赴期乎? 未及防敵, 而先遭馮夷、海若之怒, 此道臣、御史所以前後疏狀請復舊制者也。 今以四鎭, 復屬檢營, 倣庚辰遺制, 而檢營中軍兼僉使, 留鎭格浦, 監司春秋巡歷, 期會四鎭之戰艦、防卒, 操練於浦港前洋, 則無七出敗溺之危。 而格浦復爲海山關防, 他日國家緩急, 必有得力也。 臣以改量, 往來於羅州、靈巖之間, (棹)〔綽〕 楔井里, 磊落相望, 駐馬問之, 則如非忠臣之宅, 乃孝子之閭。 訪其遺裔, 今皆陵夷, 化爲編氓, 故家之流風遺韻無復存焉。 且湖南古稱華麗之地, 數十年來歲荒民飢, 不能安其魚稻之樂, 仳離流散, 而昔之高亭大榭, 傾頹不治。 古人以園囿興廢, 知洛陽之盛衰, 臣亦以亭榭傾頹, 惜湖南之蕭條也。 嗚呼! 奇大升、金麟厚之邃學高識, 金千鎰、高敬命之純忠大節, 李後白、朴祥之文章雅望, 鄭忠信之功, 金德齡之勇, 林亨秀、林悌之豪氣, 皆湖南人, 而人物盛衰, 古今不同, 此臣所以徘徊感慨, 爲聖朝長吁也。 孔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搜訪一道, 不可曰無人材。 以臣所聞, 或有文學可稱者, 或有行誼可稱者, 敢以其人姓名仰聞焉。 李頤正, 故修撰尙馨之後孫也, 閔師夏, 故舍人德鳳之後孫也, 林薱, 故留守泳之族子也, 金烠, 故參判相玉之族子, 愼師喆, 故副學天翊之後孫也, 崔弼興, 故評事慶昌之後孫也, 高晢, 故招討使敬命之後孫也, 安煌, 故參議邦俊之後孫也, 鄭敏河, 故相臣澈之後孫也。 康津 李毅敬、靈光 李重益、茂長 李萬錫、長城 柳光顯、靈巖 曹錫琛、務安 金景森、寶城 金延年、全州 李益烈ㆍ鄭斯鋏, 皆讀書講義, 固窮守靜, 或有至白首不求聞於世者。 若朝廷甄拔而用之, 則或可以激勸而興起也。 臣過一新, 歷訪其所謂忠烈祠者。 李福男等七忠臣俎豆于斯, 而有以林義士樸配食焉。 邑中父老向臣太息曰, ‘諸公殉國之節, 固皆卓絶, 而義士之死尤奇。 丁酉島夷之入寇, 孤城受圍。 兵使李公領兵赴援, 義士慨然從之曰, ‘死則俱死耳,’ 移檄賊陣, 欲入圍城, 賊徒義而開陣。 兵使與義士, 擐甲吹囉, 按轡徐行, 視死如歸。 城破而楊元潰圍遁去, 城中士民盡爲魚肉, 兵使與義士, 同赴烈焰以死。’ 臣聞其言, 不覺髮豎而起。 其所成就, 如彼卓卓, 朝家旌贈之命, 獨不及於樸, 使之掩抑沈爵於九泉之下。 此誠聖世闕典, 而非所以表揚忠節者也。 樸位卑, 未與諸臣同蒙甄奬之典, 臣尤慨惜也。 伏乞聖明亟命崇褒, 以樹風聲, 以聳頹俗。
批曰: "附陳者, 留卿之章, 待見卿而下敎, 其卽上來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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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6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호구-이동(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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