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생체실험은 비단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만이 아니었다. 1942년 12월부터 10번 블록에서 여성 불임 실험이 행해졌다.
나치는 전시(戰時)에 노동력을 마구 착취 한 후 재생산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자연사(自然死)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1941년 5월에 힘러가 “열등 여성의 비(非)외과적 불임”에 흥미를 표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런 여성 불임 연구의 선구자가 바로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산부인과 과장 카를 클라우베르크(Carl Clauberg 1898-1957) 교수였다.(라울 힐베르트 저 · 김학이 역,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p1299-1301)
그는 여성호르몬 연구로 유명했고, 불임여성을 가임하게 하는 연구와 여성을 영구 불임으로 만드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따라서 독일의 유수한 제약회사가 그를 지원하고 있었다.
당초에 힘러는 클라우베르크에게 라벤스브뤼크의 여자 수용소에서 여성 대량 불임 실험을 제안했다. 그러나 클라우베르크는 라벤스브뤼크 여자 수용소가 거리가 멀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42년 7월에 힘러와 클라우베르크는 아우슈비츠에 실험실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1942년 12월에 클라우베르크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도착했다. 이 때 수용소장 회스는 “아우슈비츠가 과학의 명소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클라우베르크는 신체적으로 부조화했다. 150cm의 키, 작은 몸 그리고 큰 머리를 가진 탓에 수감자들은 그에게 ‘저공비행’이란 별명을 붙였다. 게다가 그는 비이성적이고 과도하게 흥분하는 태도의 소유자였다. (미셸 시메스 지음 · 최고나 옮김, 나쁜 의사들, 책담, 2015, p156)
그는 10번 블록에 연구소를 차리고 ‘열등한 인종의 생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보안을 위해 10번 블록은 창문들이 막혔고, 안에는 400명의 여자들이 2개의 방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는 유대인 여성의 자궁에 마취제 없이 포르말린을 주입하거나, 난소를 떼어내고 엑스레이를 연속으로 찍는 이른바 X선 실험을 계속 했다.
몇 달 동안 수 백 명의 여성들이 수술대 위를 거쳐 갔다. 실험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는데, 여자들은 고통 받고 죽기도 했다.
1943년 6월에 클라우베르크는 힘러에게 첫 번째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만약 이와 같은 속도로 연구가 계속된다면, 적합한 장비를 갖춘 상태에서 의사 1명이 조수 10명과 함께 하루에 1천명의 여성에게 불임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시술 작업을 계속하였다. 게다가 그는 여성 난소의 화학적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압력실에 여성 수감자들을 집어넣고서 남자들에게 성관계를 강요했고 이때를 포착해 클라우베르크는 이들의 성관계 장면을 엑스레이로 촬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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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물들 |
1945년 1월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클라우베르크는 독일 베를린 근처의 라벤스브뤼크 여성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실험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6월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징역 25년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그는 독일-소비에트 협정에 의거 석방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거의 10년 뒤인 1955년, 베를린 시민들은 다음과 같은 신문광고를 읽을 수 있었다.
긴급
교수이자 의학박사인 카를 클라우베르크가 뛰어난 타이피스트를 여럿 구함.
하루에 두세 시간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즉시 연락주기 바람.
대학의료원, 외과학 (개인 연구소 1번방)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은 클라우베르크라는 이름을 숨기지 않은 광고에 분노했다. 수감자 협회 등은 즉각 소송을 재개하였지만 징벌에는 에로가 많았다. 왜냐하면 고위직 친구들과 제약회사들이 클라우베르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클라우베르크는 1955년에 체포되어 우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고, 1957년에 킬의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감방에서 죽은 채 발견 된 것이다. (미셸 시메스 지음 · 최고나 옮김, 나쁜 의사들, 책담, 2015, p169-170)
한편, 2010년 8월27일에 프랑스 통신사 AFP 등 현지 매체들은 150여개의 여성 수술기구를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 주택에서 발견했는데, 기구들은 당시 여성 수용자 불임 실험을 행했던 클라우베르크의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