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의 진실 - 고려에서 차별당한 지역은 없었다 ㅣ김동선 지음ㅣ동숭북스
『훈요십조의 진실』은 고려에서는 차별당한 지역이 없었고, 후세에 알려진 훈요십조는 조작된 사실이라는 견해를 밝힌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왕건이 등장했던 후삼국시대와 고려사 연구를 통해 훈요십조를 둘러싼 여러 미스터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고려에서는 차별 당한 지역이 없었고, 후세에 알려진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저자가 제시한 왕건 시대의 공주강(금강) 일대 지도와 제26대 충선왕이 발표한 개혁교서에 나타난 왕족과 결혼할 수 있는 가문 15개 분포도는 고려에서 후백제인들이 차별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 주고 있다.
훈요십조의 진실(김동선 전 기자협회보 편집국장/동승북스) [기자협회보] 2015.08.19
고려 태조 왕건이 후손에게 남긴 열 가지 유훈인 훈요십조에는 “차령 이남은 배역의 땅이니 그 지역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조문이 있다.
차령 이남은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왕건은 나주를 복속시킨 공으로 정권의 2인자가 됐으며 나주는 세자의 어머니인 장화왕후의 고향이다. 저자는 왕건에게 나주는 행운을 가져다준 지역인데, 왕건이 나주가 포함되는 지역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을지 의문이 들어 훈요십조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독파한 끝에 고려에서는 신라지역에 대한 우대도 없었고 후백제 지역에 대한 냉대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또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훈요십조는 조작된 것이며 해석도 심각하게 왜곡됐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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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십조의 진실(김동선 지음·동숭북스) [동아일보] 2015.08.29
현재 알려진 것처럼 고려에서는 차별당한 지역이 따로 없었으며 훈요십조는 후세에 의해 조작됐다는 주장, 고려는 고구려와 백제 후예들의 연합정권이었다는 주장이 담겼다. 1만4000원.
역사적으로 전라도의 자존감을 심각하게 폄훼한 것 중 하나가 훈요십조다. “차령 이남은 배역의 땅이니 그 지방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는 고려 왕건의 유훈은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다. 이 말은 시대에 따라 차별과 냉대를 강제한 ‘연좌제’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과연 훈요십조는 진실일까? 차령 이남은 통일신라 이래 최대 곡창지대였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지역을 고려왕조가 정말로 차별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른다.
왕건은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그는 각지의 호족 딸 29명과 결혼할 만큼 지역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더욱이 그는 나주 처녀 오씨(장화왕후)와 결혼했고, 이곳에서 맏아들(고려 2대왕 혜종)을 낳기도 했다. 그런 왕건이 과연 자신의 통치이념(지역통합)에 위배되는 유훈(훈요십조 8항목)을 남겼을까? 혹여 훈요십조가 조작되지 않았을까?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의문을 가졌음직 하다.
시사저널과 일간오늘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소설가로도 활동 중인 김동선 작가가 이 의문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가 펴낸 ‘훈요십조의 진실’은 ‘고려 왕실문서 조작 비밀’을 파고든다. 저자의 논지는 그동안 이병도 등 국사학계 주류 인사들이 후배제인들은 왕건의 훈요십조에 의해 고려에서 차별당했다고 주장한 것과 배치된다.
저자는 왕건이 등장했던 후삼국시대와 고려사 연구를 토대로 훈요십조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정리한다. 훈요십조를 연구하기 위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를 독파했다. 그 결과 “고려에서는 차별당한 지역이 없었고, 후세에 알려진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다”고 본다.
그 증거로 저자는 훈요십조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을 주목한다. 훈요십조는 고려 태조가 임종하던 해(943년) 최측근 박술희에게 구술해 알려졌지만, 세상에 나온 것은 그가 죽은 지 90여 년이 지난 덕종 3년(1034년) 때다. 더욱이 덕종의 선대 왕, 현종 때는 거란의 침공으로 많은 문서들이 소실되었다. 이 과정에서 훈요십조는 조작될 개연성을 안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이유로 훈요십조를 변조했을까? 저자는 변조 당사자로 호부상서(호부의 으뜸벼슬)를 지낸 최제안을 꼽는다. 최제안은 신라계 문신인 최은함과 최승로의 후손이었다. 학문이 탁월했던 최제안의 부친 최승로는 문서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문한(文翰)’이었다. 즉, 앞서 언급한 대로 왕건은 박술희(충청도 당진 출신)에게 훈요십조를 구술했고, 이 내용이 최승로에게 넘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필사본은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에게 가보로 전해졌을 것이다.
신라계 후손인 최제안은 후백제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만약 견훤이 침략했을 때, 조부(최승로)가 죽었다면 그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의식에는 후백제인들에 대한 악감정이 자리하고 있었을 터다.
저자가 조작 근거로 드는 또 하나의 증거는 훈요십조 원문에 표기된 ‘차현 이남’의 표현이다. 일반적인 ‘차령 이남’은 천안과 공주 사이 차령고개 아래로 충청도 절반과 전라도 전체를 아우른다. 그러나 문헌의 ‘차현’은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차현고개’를 지칭한다.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원문 문헌의 8조 내용은 이렇다. “차현이남과 공주강외(車峴以南 公州江外) 지역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뻗쳤으니, 인심 또한 그러하다.” 즉 안성에서 공주강(금강) 까지, 다시 말해 지금의 청주지역이 바로 ‘차현이남과 공주강외’에 해당한다.(당시에는 이곳이 후백제지역이 아니다)
저자는 “왕권 집권 초기 궁예를 지지했던 청주인물들이 왕건에 가장 적대적이었다는 데서 그 같은 내용이 훈요십조에 반영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저자는 “문헌에 따르면 청주 사람들은 어느 고을보다 활발하게 중앙에 진출했고, 후백제 사람들은 전란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왕건을 환영했다”고 파악한다.
왜곡의 해석 과정에 조선의 학자 이중환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중환은 ‘택리지’(을유문화사)에서 “(전라도는) 풍속이 노래와 계집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며, 사람이 경박하고 간사하여 문학을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당시 이중환은 서인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고난을 겪은 남인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의 고향은 회덕(차령 이남 금강인근)이고 또 다른 서인 송강 정철의 고향은 전라도 창평이었다. 이중환은 영조 때 광산김씨 김민택 문중에서 올린 상소로 유배를 당한 바 있는데, 광주는 광산김씨 본거지였다.
이 같은 여러 정황들이 결합돼 훈요십조가 왜곡되었다. 조작된 훈요십조는 이후 군사정권의 지역차별과 맞물려 전라도 사람들에게 정신적 내상을 주었다. 그러나 저자의 끈질긴 노력과 집요한 연구로 10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조작된 역사’는 마침낸 진실의 빛을 보는 것 같다.
[역사 속 전라도] 왕건의 '훈요십조' 진실은 뭘까? /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광주드림] 2015.05.01
훈요십조(訓要十條)는 943년 4월 태조 왕건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 후손들에게 귀감을 삼도록 박술희에게 남겼다고 전해지는 열 가지 가르침이다. 신서십조(信書十條) 또는 십훈(十訓)이라고 하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 전해지고 있다. 훈요십조는 앞부분은 서론이고 뒷부분은 훈요이며, 태조 왕건의 사상·철학·신앙·규범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불교를 숭상하되 폐단의 대책을 제시했고 왕위 계승과 대외정책의 원칙을 제시했다. 또한 도참사상과 유교를 중시하며, 경전과 역사를 널리 읽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라고 제시했다.
“내 듣건대 순(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요(堯)의 양위를 받았고, 한(漢) 고조(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의 왕업을 이룩하였다. ~ 행여나 후사들이 방탕하여 기강을 문란하게 할까 두려워하여 훈요를 지어 전하노니, 조석으로 읽어 길이 귀감으로 삼으라.”
거란 침입시 소실…다시 편찬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궁궐과 문헌들이 모두 소실되자 최항과 김심언에게 명하여 실록을 다시 편찬하게 하였다. 고려사에는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면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훈요십조를 일부 학자들은 후세 사람의 위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8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현종 때까지 단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훈요십조를 최제안이 처음으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훈요십조의 사찰 건립 금지도 지켜지지 않았고 팔관회도 성대하게 치루지 않았다. 왕위의 장자계승도 지켜지지 않았고, 서경에서 100일간 머물라는 당부도 지키지 않았다.
“훈요8조 :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 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을 면하거나, 혹 왕후, 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훈요십조 8조에는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는 배역의 땅이라 이 지역 출신을 등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백제지역인 호남 출신에 대한 차별의 논리로 악용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 龍)와 친일 매국노이자 식민사학자인 이병도가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를 호남이라고 직역하였다. 고려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차현(車峴)을 지금의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해석했고 공주강외(公州江外)를 금강 북쪽으로 해석하지 않고 금강 남쪽으로 해석했다.
‘차현이남과 공주강 외’ 해석 차이
백제의 땅을 배역의 땅이라고 해석한 것은 억지이다. 왕건은 백제인을 차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고 고려 500년 동안 오히려 호남사람을 등용하였다. 왕건의 제2왕후이며 2대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은 도선국사와 최지몽은 전라도 영암 출신이며,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출신이다. 훈요십조를 기술한 박술희는 충청도 당진 출신이다. 왕건은 반역을 일으켜서 궁예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창건하면서 차현이남과 공주강외의 지방을 경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는 궁예의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호남은 차별받는 땅이며 비극의 5월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훈요십조의 진실(김동선 지음, 동숭북스, 245쪽, 1만4000원) [중앙일보] 2015.09.19
후백제인이 훈요십조에 의해 고려에서 차별당했다는 주장이 상식처럼 퍼져 있다. 저자는 후삼국시대와 고려사 자료를 두루 살피며 고려에는 지역 차별이 없었고 훈요십조는 신라계 후손에 의해 조작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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