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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목민심서 자서, 1821년 정약용, 김세곤 정리

<김세곤칼럼>목민심서(牧民心書) 자서(自序)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군자의 학문 수신이 그 반, 반은 백성 다스리는 것

다산 정약용의 대표적 저서는 단연  <목민심서 牧民心書>입니다.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은  1818년 봄에 강진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를 완성하였고, 여름에 귀양이 풀려 9월14일에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 마재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821년 늦봄에 여유당에서 목민심서 자서(自序)를 썼습니다. 
그러면 목민심서 자서(自序)를 살펴보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뒤를 이어 12목(牧)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牧民] 하였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정치를 할 때는 사목(司牧 지방 장관)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에 가서 추목(芻牧 :가축 사육)을 백성 다스리는 데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백성을 부양하는 일을 가르켜  목(牧)이라 하는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사도(司徒)가 백성들을 가르쳐 각각 수신(修身)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자(國子 공경대부의 자제)를 가르쳐 각각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백성 다스리는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성인의 말도 없어져서 그 도(道)가 점점 어두워졌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굶어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한데도,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나의 아버지께서 조정의 후한 대우를 받아, 연천현감(漣川縣監)ㆍ화순현감(和順縣監)ㆍ예천군수(醴泉郡守)ㆍ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ㆍ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는데 모두 잘 다스린 공적이 있었다. 비록 나는 불초하지만 그때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워서 다소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보아서 다소 증험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떠도는 몸이 되어서는 이를 쓸 곳이 없게 되었다.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 한 18년 동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문을 읽혔으나, 생각해 보니 수기의 학문은 학문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에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학문의 반이라 생각하여, 중국 역사서인 23사(史)와 우리나라 역사 및 문집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사목(司牧)이 백성을 다스린 자취를  골라, 세밀히 정리· 분류 ·수합하여 차례로 편집하였다.

남쪽 변두리 땅은 전답의 조세(租稅)가 나오는 곳이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비천하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대강 기록하고 나의 얕은 소견을 붙였다.

모두 12편으로 되었는데,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요, 그 다음은 차례대로 육전(六典)이 있고,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이다.

12편이 각각 6조(條)씩 나뉘었으니, 모두 72조가 된다. 혹 몇 조를 합하여 한 권을 만들기도 하고, 혹 한 조를 나누어 몇 권을 만들기도 하여 통틀어 48권으로 한 부(部)가 되었다. 비록 시대에 따르고 풍습에 순응하여 위로 선왕(先王)의 헌장(憲章)에 부합되지는 못하였지만, 백성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조례(條例)가 갖추어졌다.

고려 말기에 비로소 오사(五事)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뒤에 칠사(七事)로 늘렸는데, 이를테면, 수령이 해야 할 일의 대강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고찰하여 스스로 시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있는 것만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방법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옛날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지었고, 유이(劉彝)는 《법범(法範》을 지었으며, 왕소(王素)에게는 《독단(獨斷)》이 있고, 장영(張詠)에게는 《계민집(戒民集)》이 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호태초(胡太初)는 《서언(緖言)》을, 정한봉(鄭漢奉)은 환택편(宦澤篇)을 지었으니, 모두 이른바 목민에 관한 서적인 것이다.

이제 그런 서적들은 거의가 전해 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괴한 글귀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주역(周易)》대축괘(大畜卦)에 ‘옛사람의 말이나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기른다.’ 하였으니, 이는 본디 내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어찌 반드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만 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당저(當宁 당시의 임금. 여기서는 순조 임금) 21년  신사년(1821) 늦봄에  열수 정약용이 쓰다.\

(참고자료)

[주1]23사(史) : 23종의 중국 역사서. 즉 《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ㆍ《삼국지(三國志)》ㆍ《진서(晉書)》ㆍ《송서(宋書)》ㆍ《남제서(南齊書)》ㆍ《양서(梁書)》ㆍ《진서(陳書)》ㆍ《위서(魏書)》ㆍ《북제서(北齊書)》ㆍ《주서(周書)》ㆍ《수서(隋書)》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ㆍ《신당서(新唐書)》ㆍ《오대사(五代史)》ㆍ《송사(宋史)》ㆍ《요사(遼史)》ㆍ《금사(金史)》ㆍ《원사(元史)》까지가 21사이고, 여기에다 《명사(明史)》와 《구당서(舊唐書)》를 합하면 23사가 됨.《與猶堂全書 第一集 第25卷 小學珠串》

[주2]육전(六典) : 육조(六曹)의 집무 규정. 즉 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

[주3]오사(五事) : 수령오사(守令五事)의 준말로 수령이 힘써야 할 다섯 가지 일. 고려 우왕(禑王) 원년(1375)에는, 전야를 넓히고[田野闢], 호구를 늘리고[戶口增], 부역을 고르게 하고[賦役均], 송사를 간편하게 하고[詞訟簡], 도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盜賦息] 등 다섯 가지 일로 수령을 고적(考績)하였으며, 창왕(昌王) 원년(1388)에는 조준(趙浚)의 상소로 도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말 대신 ‘학교를 일으키는 것[學校興]’으로 바꾸고 역시 오사를 가지고 주군을 순찰하였음.《高麗史 卷75 志29 選擧三》 《星湖僿說 人事門 七事》

[주4]칠사(七事) :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준말로, 수령이 고을 다스리는 데에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 농상(農桑)을 진흥시키고[農桑興], 호구를 늘리고[戶口增], 학교를 일으키고[學校興], 군정(軍政)을 잘 닦고[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하고[賦役均], 송사를 간편하게 하고[詞訟簡],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없애는 것[奸猾息] 등임.《經國大典 吏典 考課》《星湖僿說 人事門 七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