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호남의병의 길’ 순례기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5월31일에 ‘한말 호남의병의 길’ 순례를 하였다. 전남 장성군이 호남 최초로 6.1에 ‘제5회 의병의 날’ 전국 기념행사를 하였다.
이번 순례는 이 행사의 일환으로 장성문화원이 후원하였다. 참여자는 광주 · 전남 지역 유림과 학계 그리고 의병 후손 등 40명, 순례지는 한말 호남의병의 주축 인물인 기정진, 기우만, 고광순 그리고 기삼연의 흔적이다. 순례코스는 장성 고산서원에서 출발하여 장성향교, 기삼연 묘소, 위정척사기념탑과 기정진 묘소, 고광순 사당 및 조선오난 호국충혼탑, 나주향교 그리고 기삼연 순절지인 광주공원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아침 9시 고산서원에서 출정식을 하였다. 유안중 창평향교 전교가 성리학 6대가이고 병인위정척사 소를 올린 노사 기정진(1798-1879) 영전 앞에서 고유축문 告由祝文을 읽고 만세삼창을 하였다. 그리고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1846-1916)이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한 삼성산에 망배하였다.
이어서 한말 장성의병 발상지인 장성향교를 답사하였다. 기우만은 1896년 2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이사유, 이주현, 고기주, 양상태, 기재 등 의병 200여 명과 함께 창의하여 나주로 이동하였다. 나주향교에서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호남대의소를 창설하였고, 기우만은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있는 호남창의회맹소 영수 기삼연(1851-1908) 묘소이다. 기삼연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가 있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이 의병가는 당시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기삼연은 양반 출신이었고, 본명이 전수용인 해산(海山)은 농민출신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참모였으며, 본명이 김준(金準)이고 자가 태원(泰元)인 죽봉(竹峰)은 참봉 출신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이었다. 안담살이는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평민 출신 박포대는 본명이 박경래로 그가 총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07년 10월에 기삼연은 김익중 · 김용구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호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하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기정진의 재종질로서 1896년에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7년 7월19일에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8월 1일을 기하여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하였다. 정국은 혼란과 암울 그 자체였다. 1907년 9월 29일 기삼연은 마침내 수연산 중턱 석수암에서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를 들어 적을 토벌할 것(擧義討賊)’을 맹세하고 의병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의병부대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고 정하였다. 맹주에는 기삼연, 통령에 영광의 김용구, 선봉에 나주의 김준(후에 김태원이라 했다)이었다.
기삼연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1일 고창의 일본 경찰을 20여명 죽이고 고창읍성에 입성하였고, 12월7일에는 법성포를 습격했다. 12월9일에는 장성우편국을 파괴하고 우편소장을 처형했다.
이후 영광, 나주, 담양, 고창, 함평등지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및 일진회 회원을 죽였다.
1908년 1월 30일 기삼연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일병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기삼연 의병은 밤새 싸웠으나 30여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삼연도 부상당하여 군무를 통령인 김용구에게 일임하고, 순창군 복흥면 조동의 집안 동생 기구연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1908년 2월 2일 설날에 일병 20여 명이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하였다. 처음에는 기삼연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쌀가마 밖으로 나온 버선을 보고 기삼연을 체포하였다.
이 날 선봉장 김준 부대는 창평 무동촌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가와미츠와 부하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기삼연의 체포 소식을 들은 김준은 기삼연을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 명을 이끌고 경양역까지 추격했으나 기삼연은 이미 수감된 뒤였다.
기삼연 구출 작전을 알아차린 일본군은 2월3일에 재판 절차도 없이 기삼연을 광주천변 백사장에서 왼팔을 자르고 머리에 관통상을 입혀 죽였다.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들은 광주 사람들은 설인데도 불구하고 부녀와 아이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항일 호남의병 수장을 잃은 광주 민중들의 슬픔은 컸다.
기삼연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싸움터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역시 헛것이었나. 呑(탄)日腹年夢亦虛
그의 시신은 광주 서탑동(현 사직공원)에 안장되었고, 그 후 조상들이 모셔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보룡산에 모셔졌다가, 2009년 5월 생전에 사셨던 하남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이장되었다.
일행들은 기삼연 묘소 앞에서 참배하고, 성균관 부관장 박래호는 추모시 낭독을 하였다. 후손인 기광서 조선대 교수의 인사말도 있었다. 기교수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배하여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만세 삼창을 하고 묘소를 떠난 시간은 11시경. 참으로 의기에 찬 순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말 호남의병의 길’ 순례기 (2)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삼연 묘소를 뒤로 하고, 다음으로 가는 곳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 봉산부락에 있는 노사 기정진 선생 묘역이다. 이곳에는 위정척사 衛正斥邪 기념탑과 노사 선생 묘소가 있다.
먼저 노사 선생 묘소부터 참배하였다. 묘소 봉분은 평평하다. 묘비에는 ‘조선 노사 기선생지묘, 증 정부인 울산김씨 부좌’라고 적혀 있다.
묘소 왼편에 있는 묘갈비에는 ‘조선 노사 기선생 묘갈명 병서’가 적혀 있다. 문인 정재규가 찬 撰하였고, 문인 오준선이 전서(篆書)를 쓰고, 문인 삼종손 기재가 글씨를 썼다. 기재는 을사오적 암살단의 주역 기산도(1878-1928)의 아버지이다. 기산도는 을사오적 군부대신 이근택 암살을 기도한 의사 義士로, 장인이 녹천 고광순이다.
일행은 묘소 앞에서 참배를 하고 후학 공연웅이 추모시와 추모문을 낭독하였다. 노사 선생의 학문은 심신함양이었고, 정신은 위정척사라고 추모하였다.
일행은 위정척사 기념탑에서 종손 기호중의 말씀을 들었다.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한다는 위정(衛正)과,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 배격한다는 척사(斥邪) 운동이다. 이에 불을 댕긴 이는 노사 기정진(1798-1879)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기정진은 1866년 8월16일에 프랑스 이양선의 출몰과 관련하여 아뢰었다. 소위 병인6조소(丙寅六條疏)였다. 이어서 동부승지 화서 이항로도 9월12일에 외적과 화친하지 말고 항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는 고종실록에 실려 있다)
기념탑에는 丙寅六條疏(병인육조상소)가 새겨져 있다. 즉 제단 오른 편탑에는 定廟算(정묘산) 조정의 정책을 확정할 것, 修辭令(수사령) 정령의 난맥을 바로 잡을 것, 審地形(심지형) 지형을 잘 살펴 외적을 방어할 것이 새겨져 있고, 왼편 탑에는 練兵(연병) 군사훈련을 철저히 할 것, 求言(구언)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여 많은 의견을 들을 것, 內修外攘(내수외양) 안으로 정치를 잘 하고 밖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칠 것이 새겨져 있다.
한편 위정척사기념탑 아래 공원 왼편에는 1997년에 세워진 노사 기정진 선생 신도비가 있다. 비명은 면암 최익현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김응현이 썼다.
오른 편에는 기우만 · 고광순 · 기정진 의병장의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의병장의 어록과 약력이 앞뒤로 새겨져 있다.
먼저 송사 기우만(1846-1916) 의병장 어록을 읽는다.
人雖死而義不死(인수사이의불사)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의는 죽지 않고
國雖亡而義不亡(국수망이의불망)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의는 망하지 않는다.
다음은 녹천 고광순 (1848-1907) 의병장의 어록이다.
一死報國 (일사보국) 한 번 죽어 보국하고자 함은
吾所必定 (오소필정) 내 마음에 정한 바이다.
성재 기삼연(1851-1908) 의병장의 어록은 절명시이다.
出師未捷身先死(출사미첩신선사) 싸움터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呑日腹年夢亦虛(탄일증년몽역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역시 헛것이었나.
이윽고 장성군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있는 고광순 사당 포의사로 향하였다. 버스에서 필자는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고광순의 ‘불원복(不遠復) 태극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1907년 구례 연곡사에서 ‘머지않아 국권이 회복된다.’는 의미의 불원복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일본 군경과 싸우다가 순절한 고광순. 그의 충의는 역사에 남으리라.
그런데 고광순 사당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다. 별수 없이 사당 뒤에 있는 ‘조선오난 호국충혼탑’만 참배하였다. 충혼탑에서 내려오면서 사당 밖 길에서 녹천 선생에 대하여 묵념을 하였다.
다음 행선지는 나주 향교이다. 나주로 가는 버스에서 임진왜란 의병장 최경회 장군 후손이 ‘진주 삼장사’ 시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였다. 진주성 삼장사는 누구누구인가? 삼장사 시가 누구의 작품인지에 대하여는 영남과 호남이 상반된다. 이에 대한 역사적 논증을 호남사람들이 주도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윽고 나주향교에 도착하였다. 대성전 앞에서 참배를 하고 김봉곤 교수로부터 기우만의 의병 활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기우만은 고광순 · 기삼연과 함께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나주 일대의 의병과 함께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이끌었다.
마지막 순례지는 기삼연 순절지인 광주공원이다. 기삼연은 1908년 설날 다음날인 2월3일에 광주천변 백사장에서 처형되었다. 아쉬운 것은 처형장소에 대한 안내판이 없는 점이다.
별수 없이 광주공원 안 오층석탑 언덕에서 추모를 하였다. 박래호 성균관 부관장이 아베 정권의 망언을 성토하는 글을 낭독하였고, 후학 오기주가 의병정신 계승하자는 구호제창과 만세삼창으로 오후 6시에 순례를 모두 마무리 하였다.
한 가지 희망은 내년 ‘의병의 날’에도 ‘한말 호남의병의 길 순례’를 하였으면 한다. 그러려면 ‘노사학 연구소’ 사단법인화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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