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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오전, 광주광역시 학동 무광사(武光祠)에서는 국제고와 전남여상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김천일, 김덕령, 정운, 송희립, 강항, 노인에 대한 추향제를 갖는다. 12월 16일은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11월 19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현충사의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에는 노량해전 설명문이 적혀있다. 뱃길을 열어 퇴각하기 위해 조명연합수군을 포위 공격하려는 일본수군을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막아 격퇴한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 한마디로 노량해전은 고니시의 철수를 막기 위한 순천 왜교성 싸움의 마지막 결전이다. 그러면 노량해전의 전모를 살펴보자. 1598년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11월 15일까지 부산으로 철수하여 귀국하라고 명령하였다. 장생포의 가토, 사천의 시마즈, 순천의 고니시는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11월 8일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적들이 11월 10일 사이에 철수한다고 하니 귀환길을 막자고 말하였다. 9일에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고금도를 떠나 11일에 순천 앞바다에 진을 쳤다. 13일에 고니시는 왜선 10척을 출항시켰다. 그런데 이순신이 이들을 추격하자 왜군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고니시는 명나라 육군 도독 유정에게 순천왜성을 넘겨주기로 하고 철수를 보장 받았으나, 진린과 이순신이 걸림돌이었다. 14일에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어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에게 수급 2천을 주면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이날 진린은 왜군 통신선 1척을 남해 쪽으로 보내주었다. 이는 노량해전의 시발점이었다. 뒤늦게 통신선이 순천을 떠났다는 소식을 안 이순신은 급히 송희립 등 여러 장수와 의논하였고, 왜군 구원군을 먼저 격퇴하고 나서 고니시를 쳐부수기로 하고 남해 출전을 결정하였다. 15일에 이순신은 진린을 만나 왜선을 보낸 것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그런데 이 날도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보냈다. 한편, 고니시는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바쳤으나 이순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11월 18일에 이순신은 출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을 그냥 돌려보내자고 말하였다. 이순신은 결연히 거절하고 단독으로라도 출전하겠다고 하자 진린도 별수 없이 따라 나섰다. 한편, 시마즈는 고성에 있는 다치바나, 부산의 테라자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 군과 함께 500척 배에 1만 명의 구원군을 싣고 노량바다로 집결했다. 18일 오후에 조선수군 70척은 남해 관음포에, 명나라 수군 400척은 곤양 죽도 부근에 닻을 내리고 대기했다. 군사는 1만5천명이었다. 결전에 앞서 이순신은 갑판에 올라가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적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19일 새벽 2시경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1천여 척에 달하는 함대가 캄캄한 밤에 서로 엉켜 싸웠다. 대혼전이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조명연합수군이 승기를 잡았다. 일본 수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왜군의 치명적 실수였다. 관음포를 큰 바다로 가는 수로로 생각한 것이다. 날이 밝자 육지에 막힌 포구라는 사실을 안 일본 수군은 일부는 육지로 도망했고, 일부는 조명 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였다. 이 와중에 왜군 한 명이 이순신에게 총을 쏘았다. 이순신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회과 조카 완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곁에 있던 송희립이 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해를 옷으로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한편, 1960년대에 필자는 이순신 장군이 일본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고 배웠다. 사실왜곡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명량’ 영화로 대박이 난 순천 출신 김한민 감독이 영화 ‘노량’을 어떻게 만들지 하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까, 아니면 흥미위주로 소설을 쓸까? < 호남역사연구원장> <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