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무호남 시무순신 若無湖南 是無舜臣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명량’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이순신과 아들 회가 들판을 걸으면서 울돌목 회오리에 대하여 한 이야기입니다. “천행이었다.” “천행이라니요. 그렇다면 아주 낭패를 볼 수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 순간에 백성들이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냐.” “백성을 두고 천행이라 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명량’의 마지막에는 전라도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이 말은 이순신이 1593년 7월 16일 한산도에서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구절입니다.
그랬습니다. 조선 7도가 일본에 점령되고 선조가 압록강변 의주로 피난을 갔어도 전라도만은 무사하였습니다. 이순신이 바닷길을 막고 호남의병들이 육로를 지켜 호남은 온전하여 나라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군사들을 이끌고 옥포에서 첫 승리를 한 이후, 한산대첩 · 부산포 승첩을 통하여 왜군 수군을 바다에서 몰아냈습니다.
1597년에 일본은 다시 조선을 쳐들어왔습니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맨 먼저 한 일이 이순신 제거작전입니다. 일본의 간계에 놀아 난 조정과 선조는 이순신을 하옥하고 백의종군 시킵니다.
그러나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고
8월3일에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사겸 심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임명장을 받자 마자 전라도로 달려온 이순신은 구례 곡성 순천 낙안을 거쳐 군사를 모으고 보성에 이르렀습니다.
8월15일에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 임금의 유지를 받았습니다.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어명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착잡하였다. 조속히 수군을 재건하여 나라를 구하라고 교지를 내린 지가 보름도 채 안 지났는데 이제는 수군을 폐지하라니. 이순신은 곧바로 장계를 작성하였습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전선수가 적다하나 보잘 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9월16일에 해남과 진도사이의 울돌목에서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무찔러서 31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이날의 ‘난중일기’에 ‘실로 천행 天幸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겨울을 나면서 전선 40척을 건조하였고, 1598년 2월17일에 완도 고금도로 옮겨서 삼도수군통제영을 차렸습니다. 고금도는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천혜의 요지였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수군은 함대가 80여척으로 늘어났고 군사도 8천명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순신에 의지해 피난 온 백성들이 1,500명이나 되어 섬에는 수백호의 민가가 생겨났다. 한마디로 고금도는 한산도 보다 치세하였습니다. 7월에는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도 고금도에 합류하였습니다.
8월 하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이 소식이 조명연합군에 조 알려지자 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에 들어갑니다. 울산의 가토와 사천시마즈, 그리고 순천의 고니시 섬멸 작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9월 중순에 명나라 제독 마귀와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울산성을 공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였고, 명군 제독 동일원의 중로군은 사천의 시마즈군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여 1만명 이상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쟁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편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서로군과 진린 · 이순신의 연합수군이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9월21일부터 10월9일까지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육군 제독 유정의 무기력한 지휘와 육군과 수군간의 엇박자로 순천왜성 점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있는 왜군을 11월15일까지 철수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울산 사천 순천의 왜군들은 모두 부산에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이를 안 이순신은 순천의 고니시 왜군을 치기 위하여 여수 장도로 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서로군 제독 유정을 고니시와 밀약을 하여 고니시를 보내기로 하였고, 진린 또한 뇌물을 받아 방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진린은 고니시의 배가 남해로 가는 것을 허용하여 시마즈의 왜군들이 구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샌드위치 신세가 된 이순신은 노량으로 가서 일본 수군을 치기로 하였습니다. 명 제독 진린은 이를 말렸으나, 이순신이 뜻을 굽히지 않자 진린도 마지못하여 해전에 참여하였습니다.
11월18일에 조명연합군은 조선수군 7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의 배에 군사 1만5천명을 싣고 왜교성 앞바다를 떠나 노량으로 진군했다.
18일 밤에 이순신은 갑판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적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此讐若除 死則無憾”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나무재갈을 물렸다. 이순신은 숨 죽여 왜선을 기다렸다. 조선군은 남해 관음포에 명군은 곤양 죽도 부근에 닻을 내리고 대기했다. 드디어 전투는 19일 새벽 2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선봉의 적함을 겨냥했다. 이 날의 전투는 과거 다른 해전과는 달리 근접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거의 천 여 척에 달하는 함대가 서로 엉켜 싸웠다. 더구나 캄캄한 밤이었다.
이렇게 대 혼전이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승기는 조명연합수군으로 넘어갔다. 일본 수군은 조선함대의 화력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순신은 선두에 나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드디어 일본 수군은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왜군의 치명적 실수였다. 관음포를 큰 바다로 가는 수로로 생각하고 진입한 것이다.
날이 밝자 왜군은 이를 깨달았다. 육지에 막힌 포구라는 사실을 안 일본 수군은 일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했다. 나머지는 조명 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였다. 전투는 더욱 격렬하여졌다.
이 와중에 왜군 한 명이 이순신에게 조총을 쏘았다. 이순신은 탄환을 맞았다.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회과 조카 완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곁에 있던 송희립이 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해를 옷으로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11월19일 정오 무렵에 전투가 끝났다. 일본수군은 200척이 침몰 당하였다. 시마즈와 소 요시토시는 가까스로 도망쳤고, 고니시도 남해도 외해를 통해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이 이순신의 배에 다가와 왜군에 포위된 그를 도와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려다가 비로소 그의 죽음을 알았다. 진린은 큰 소리로 통곡하자 이순신의 죽음이 모두에게 알려졌다. 11월19일(양력 12월16일) 이른 아침이었다.
이 해전에는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 첨사 이영남도 전사하였다. 이영남은 조방장도 겸하였는데 완도 고금도 충무사에 이순신과 함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호남절의록>에는 오용운, 오극성, 남병, 나득룡, 김몽성, 이충실, 김덕방, 김예의, 김득효 강극경, 이덕수, 김득룡, 이응춘, 신인수, 김두흥, 이덕경, 김말동, 김백운 등도 노량해전 전사자로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과 중군 도명재 등 명나라 수군도 상당수 전사하였다.
한편 좌의정 이덕형은 노량해전에서 수군의 활약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치계하였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27일)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 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의 전 도민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늙은 할미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우연치 않게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을 당했다. 그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1604년에 <징비록>을 썼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지 312년이 되는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조선이 망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순신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 가지 걱정인 것은 다시 영웅사관이 다시 부활할 까 보아 걱정입니다. 이순신은 군신이 아닙니다. 군사와 백성과 함께 전란을 극복한 것이지, 신이나 영웅이어서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인간 이순신의 애증과 고뇌를 살펴보도록 ‘난중일기’를 읽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약무호남 시무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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