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순신 흔적 답사

이순신과 여수 충민사, 김세곤 기고, 여수신문

전라좌수영 백성들이 충민사를 지었다니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yeosunews@hanmail.net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신고하기
승인 2014.01.23  09:25:24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네이버구글msn
  
 

'여수와 이순신' 글을 기고하고 나서 이순신을 더 공부하고자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검색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다가 충민사에 관한 놀라운 기록 하나를 발견하였다. 1598년 11월 1일자 기사이다.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왜군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중략) 이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중략)

명나라 제독 진린이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하다가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다.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도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불렀다. (朝廷贈右議政, 海邊之人相率爲祠宇, 號曰忠愍)
아니, 충민사는 선조 임금의 명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라좌수영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를 짓고 충민사라고 불렀다니. 

이는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바꾸어야 할 중대 사항 아닌가? 
한편으로는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흥분하여, 여수시청 홈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충민사는 이순신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1601년에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통제사 이시언에게 명령하여 건립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항복이 지은 '충민사기(忠愍祠記)'도 뒤졌다.  충민사기 앞부분에 "1600년 1월에 선조는 이항복에게 '아직도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지 못했기에 너에게 명령하니 그의 공적을 밝히도록 하라'고 하여 통제사 이시언이 공사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정말 헷갈린다. 기록들이 이렇게 서로 다르니. 이번에는 선조실록을 검색하였다. 그랬더니 1598년 12월 1일자에 비변사가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한 기록이 적혀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이 지난날 한산도에서 승첩을 거두어 큰 공을 세웠고, 수군이 패몰된 뒤에는 잔파된 나머지를 수습하여 기계와 군량을 전날과 다름없이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의 괴수를 불에 태워 죽이고 전함 2백여 척을 포획하기까지 하여 의기를 동남지역에 크게 떨치자 적추는 혼비백산하여 밤에 도망쳤으니, 국가를 회복시킨 공에 있어서 이 사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숨을 거두면서도 조용히 처치하였으니 옛날 명장의 풍도를 지녔다고 이를만합니다.

이제 성교를 받들어 관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자식들도 모두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충의를 격려함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이 되었습니다. 해변에 사당을 세우는 일은 좌수영 본진에 설립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중략)"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를 읽어보니 1598년 12월에 비변사가 이순신 사당 세우는 것을 선조에게  윤허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비변사는 왜 1599년까지 사당을 안 지은 것일까? 선조는 왜  사당 건립을 챙기지 않고 있다가 1600년 1월에 이항복에게 다시 지시한 것일까? 1598년 12월부터 1601년 중에는 여수에 이순신 사당이 없었나? 아니면 있었나?

필자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전라좌수영 백성들이 1599년경에 여수에 이순신 사당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석천사도 1599년에 지어졌다. 
따라서 기존의 견해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본다.
"조정에서 이순신 사당을 짓기 전에 전라좌수영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여수에 충민사를 세웠다. 조정은 1601년에 사액사당을 건립하였다"

아무튼 이 글은 문제제기이다. 앞으로 면밀한 고증이 필요하다. 그 일은 문화재청과 역사학자 그리고 향토사학자의 몫이다.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