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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장성남문의병

장성남문의병 제2회 고경명 마상격문으로 의병을 모으다. 김세곤 글...

제2회 고경명, 마상격문으로 의병을 모으다. 

                    초안입니다. 의견 주시길... 김세곤 배


금산 전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광주시 남구 압촌동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기묘명현 고운이고 부친은 대사간 고맹영, 장인은 김백균이다. 김백균은 김경수의 사촌 형이다. 김경수의 아버지는 4형제인데 장남이 광주목사를 한 김응두로서 김백균의 부친이고, 막내는 김응정으로 김경수 아버지이다.


  고경명은 어릴 적부터 시문에 능하여 임억령, 정철, 김성원과 더불어 식영정 사선으로 알려졌다. 식영정과 면앙정, 소쇄원에는 그가 지은 시가 걸려 있다. 고경명은 1558년 26세의 나이에 문과 갑과에 장원 급제한다. 이어서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공조좌랑 등을 거쳐 명종의 총애를 받는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출세가도를 달린다.


호사다마라 할까. 고경명은 그의 나이 31세인 1563년에 이량 사건

으로 울산군수에서 파직 당한다. 이량은 효령대군의 5세손이며

명종 비 심왕후의 외삼촌이다. 명종은 1559년에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량을 중용하였다. 그런데 이량

또한 전횡을 행사한다.


추종자들만 중용하고 자기 아들을 무리하게 과거에 장원 급제시켜

병조좌랑에 앉히었으며 이를 반대하는 기대승, 허엽, 윤두수 등

신진 사림을 숙청하려 하였다.


이에 기묘명현 기준의 아들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 등은

이량을 탄핵하는 글을 명종에게 올린다. 이 탄핵 논의 자리에

홍문관 교리 고경명도 참가하였다. 그런데 고경명은 이 사실을

장인 김백균에게 알리었고 김백균은 이량에게 말한다.

(이 사실은 명종실록 1563년 8월 19일 기사에 나온다.)


한편 심의겸은 누나인 명종비 심왕후을 통하여 이량의 비위를

명종에게 아뢰었고, 명종은 이량을 평안도 강계로 유배 보낸다.

이량의 당이었던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과 아버지 고맹영도

파직된 후에 귀양을 간다. 고경명은 탄핵 논의 누설 혐의로 1563년 11월 울산군수에서 파직된다. 그리고 1581년까지 18년간 출사의 길이 막힌다. 이후 고경명은 초야에 묻힌 18년간을 자기 수양의 기회로 삼는다. 향리의 많은 선비, 인재들과 사귀었고, 무등산 유람기 '유서석록'도 남긴다.


1581년에 고경명은 영암군수로 임명된다. 그리고 종계변무사 김계휘의 종사관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김계휘는 전라도 관찰사를 한 바 있고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이다.) 1590년에 그는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송강 정철(1536-1593)과 친하다고 하여 1591년에 파직을 당한다. 당시 좌의정 정철은 세자 책봉을 선조에게 건의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 강계로 귀양을 간 것이다. 또한 오천 김경수도 이 당시에 정철이 천거하여 예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정철이 유배를 가자  부임하지 못하였다. 


다시 임진왜란으로 돌아가자. 6월11일에 고경명 의병은 담양 추성관에서 출발한다. 맹주는 고경명, 좌부장은 유팽로, 우부장은 양대박, 종사관은 안영이었다. 6월 중순에 고경명 의병이 태인 금구를 거쳐 전주에 이르렀을 때 나쁜 소식을 듣는다. 관군이 용인전투에서 참패하였다는 것이다. 전라관찰사 이광이 충청 경상관찰사와 연합하여 5만명의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 중에 왜군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군사에게 용인에서 패전한 것이다. 이에 연합의병은 서울로 가려던 길을 멈추고 우부장 양대박에게 의병을 더 모으도록 하고, 전주에서 군사훈련에 임한다.


 그러면서 고경명은 6월24일에 각 도의 수령과 백성, 군인들에게 격문을 보낸다. 이것이 바로 말 위에서 쓴 격문이라 일컫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격문은 광주 · 남원 · 전주 · 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각지의 선비들과 백성들의 심금을 울려 의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무려 6천명이 모인 것이다.


 고경명의 마상격문은 오늘날도 식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최치원의 ‘황소격문(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에 버금 갈 정도로 유명하다.


한편 고경명 부대는 6월27일에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하였다. 그런데 황간에 있던 왜적이 금산을 넘어들어 전주로 쳐들어 갈 것이란 소문이 들려왔다. 고경명도 전주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7월1일에 연산으로 진을 옮기었다. 7월6일에 고경명 의병이 진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왜군이 금산을 침범하여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7월8일에 고경명 의병은 금산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 당시에 금산지역에서는 모두 세 곳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하나는 7월7일과 7월8일에 일어난 웅치(곰티재)전투이다. 이 전투는 김제군수 정담과 나주판관 이복남, 전주의병장 황박, 순창현감 김제민이 이끌었는데 머리가 이끄는 왜군에게 패하여 김제군수 정담이 순절하고 만다.  다른 하나는 7월8일에 일어난 이치(배티재)전투로서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적을 막았다. 세 번째는 7월10일의 와평(눈벌) 전투로서 고경명은 고바야카와가 지휘하는 왜군에게 패하여 순절한다.


김세곤 ( 역사인물기행작가,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담양 추성관  담양 동초등학교에 있다.

     2. 마상격문  

     3. 광주 포충사 : 고경명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는 사당이다. 




(부록 : 고경명의 마상격문)


임진년 6월 모일에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 의흥위 부호군 지제교 고경명은 삼가 각 도 수령과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급히 통고한다.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의 국방이 튼튼치 못한 틈을 타서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장수들은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고 수령들은 도주하여

산골로 숨어 버렸다. 적들의 포위 속에 부모를 버려둠이 이 어찌

차마 할 노릇이며, 임금에게 나라를 근심케 함이 그대들에게 편안

하겠는가. 백 년 동안 교화된 백성들로서 어찌 한 명의 의기 있는

사나이도 없단 말인가?


의롭지 못한 군대를 끌고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옴은 본래 병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나라 백성들로서 왜적의

침입에 아무런 대책이 없이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구나.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혜의 요새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서울까지 기어들었다. 나라에 인재가 없다는 조롱도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원수들이 제 마음대로 덤벼드는 모양도 못 볼

일이다. 


아, 우리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하였으나 이 또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지방 순시를 나간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불길한 전방의 소식으로 인하여

임금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어렸고, 임금의 행차는 높은 산,

험한 고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하늘이 이 나라를 구할 원로를

보내오고, 우리들을 믿는 임금의 간곡한 교서가 오늘도 내려오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사람으로서 통분한 나머지 목숨을 바치려는 생각이

없겠느냐? 어쩌다가 일이 잘못되어 나라가 이 지경에 빠지게 되었

는가? 


피난 간 임금의 수레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는데 용인으로 올라

오던 우리 군사들은 패전하고 말았다. 저 땅벌과 같이 추한 왜적

들이 들끓고 있는 데, 아직 그들을 죽이지 못한 탓으로 원수들이

서울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드는 것이

장막의 제비와 같고, 서울 근처에서 둥지를 틀고 있으니 울안에서

뛰노는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명나라 군대가 소탕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들을 한 놈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고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류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자기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 이는 모두가 강요해서 왔거나 억지로 모여든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국가 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을 아끼려고 하겠느냐! 


의리를 위하여 떨쳐나선 군대이니 신분의 귀천과 직위의 고하에

상관될 바 없으며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지 견고한지를 논할 바가 아니다.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 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 다 함께

분발하였다. 


아, 각 고을 수령들과 각 지방의 인사들이여! 어찌 나라를 잊어

버리랴? 마땅히 목숨을 저버릴 것이다. 혹은 무기를 제공하고

혹은 군량으로 도와주며 혹은 말을 달려 선봉에 나서고 흑은

쟁기를 버리고 논밭에서 떨쳐 일어서라! 힘닿는 대로 모두 다

정의를 위하여 나선다면 우리나라를 위험 속에서 구해 낼 것인바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임금이 피난 간 곳은 저 먼 북쪽 땅이나 국가는 곧 회복될 것이니

어찌 북쪽 땅에서 오래 머무를 것이냐. 초기에는 비록 불리했으나

나라의 형편은 바야흐로 좋아지고 있고, 이 나라를 수호하려는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호탕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제때에 시국을 바로잡아야 하나니 부질

없이 앉아서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 백성들은 이 나라의

회복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마땅히 의기와 힘을 내서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의 진심을 토로하여 널리 고한다.